근.현.대.사 2011.12.29 08:19
군 위안부의 태동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제1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용 매춘시설에서 위안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설은 1932년 군에서 직영한 상해 해군위안소를 위안부의 기원으로 본다. 현재의 통설이다. 제3설은 "모집"에 의해 민간인 위안부가 조달되기 시작한 중일전쟁기 전후를 그 시작으로 본다.

세계 어딜가도 군인이 있는 곳은 매춘의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軍事機密)明治三十七八戰役統計』에 따르면 1905년 9월 현재 관동주에 거류 중인 일본인 2명 중 1명이 매춘부로 조사되고 있다. (관동주 55.4%, 여순 49.2% 금주 78.9%가 매춘부)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병이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막대한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당시에는 전사자가 1,378명인데 비하여 성병으로 전선에서 탈락한 자는 2,012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군당국이 장병의 곧휴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 논저를 살피건대, 군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매춘시설을 통제하거나 감독, 관리하는 묘수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수해준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이 발발하기 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주둔하였던 러시아는 주둔지 안에 허가받은 매춘업소를 설치하였는데 가옥의 무상대여는 물론 보초병을 세우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장병들이 매춘업소를 통과하려면 우선 소속 부대에서 군표를 구매하여 이것을 보초병에게 제시하고 들어갔다. 매춘부들은 수입한 군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대신 소정의 세금을 러시아 군에 바쳤는데, 이런 시스템은 일본 위안부 운영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춘시설은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국, 프랑스, 일본 주둔지에서도 설치되었고 매춘부의 채용 및 위생관리 등에 있어 상호협조하기로 했던 바, 이때 허용된 매춘부의 최저 연령은 13세라지? ㅋ 도동놈의 새끼들. 따라쟁이 일본은 이때 꼽사리 꼈다가 러시아의 선진기법에 흠뻑 감동을 받고, 대동아 전쟁 수행시기에 중국과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결 :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일본은 상해에 해군위안소를 처음으로 시범설치하였는데, 1936년 말 상해영사관의「在留邦人의 特種婦女 狀況 및 단속」이라는 문서를 보면 해군위안소에 종사하는 전체 작부 131명 중 조선인이 29명이라 되어 있으니, 소위 강제연행으로 표방되는 중일전쟁기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대좌부 출신의 위안부는 일본군 전용 섹스파트너로 종사하였지만, 오늘날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바람직 할 것 같다.

1933년 4월 관동군 혼성제14여단에서 작성한「衛生業務旬報」에 따르면 평천(平泉)에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娼妓) 38명이 들어와서 개업했으므로 16일 이들의 검미(檢黴)는 앞으로 매주 1회 실시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중일전쟁기 이전 일본군 위안소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창기(娼妓)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처럼 조선의 순결한 처녀를 인간사냥하듯 납치하여 군용트럭에 싣고 온 사람들일까? 물론 자의가 아닌 사기와 강요, 또는 인신매매에 의해 부득이 위안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가 군과 결탁한 업자의 손에 트레이드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사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 소수였다, 다수였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같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징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증언자의 사례를 취합해 통계를 산출하는 것은 표본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신뢰성이라곤 1g도 없어보인다. 그런 어설픈 논증으로 일본 원숭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1940년 5월 삼천리에는 「武漢의 朝鮮 동포」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무한(武漢) 삼진(三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는 내지인 약 육천 명, 반도인 약 이천 명이다. 그 생활 상태는 대개 부유하며 또한 일지사변(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각색각종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그외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전지(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위안부라 하면 흔히 포주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동과 생활이 제약된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군 육군대장의 1년치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안부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없다. 이게 단순히 만주의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역시 같은 잡지 삼천리(1941년 제13권)「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씨와 상해의 조선인 제문제를 語함」이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기자 : 남경에는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남경에는 1,000명의 거류동포(居留同胞)가 있습니다.

기자 : 남경에 있는 1,000여명의 조선 동포는 대체로 어떠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위안소,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상해의 위안소는 유곽업과 동종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류동포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나 유괴된 자가 아닌 여권을 소지하고 영사관에 정식신고된 조선 국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나의 의심은 계속된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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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민해방군 2011.12.29 0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말기 경성부 관내 등록된 ♫♫♫만 3만명... 이들중에서만 뽑아도 위안부 숫자는 맞을텐데...

    • MAUS.K 2011.12.29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일본애들이 업소女는 싫다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인민해방군 2011.12.29 0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차피 ♫♪♫들하고 @@ 하는건디?
      왜 갑자기 <민간인>하고 떡치는 스팸광고가...!?

    • MAUS.K 2011.12.29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조선내 업소女들의 상당수가 성병 위험군이라서요. 그래서 내외를 막론하고 민간인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2. Minowski 2011.12.29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저 시대 역사는 파면팔수록 흐드드 해지는 듯...

  3. 강희대제 2011.12.29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장이면 4성장군인가요? 근데 그 1년치 연봉과 맞먹어요?

    • MAUS.K 2011.12.30 1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화15년 고등관 연봉테이블을 참조해보니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연봉 9,600엔
      육군대장은 육군급여령에 의거 연봉 6,600엔

      따라서 저 위의 삼천리호 기사가 사실이고
      화폐가치가 일본과 같다는 전제하에
      연봉순 위안부 >>> 총리대신 > 육군대장

  4. Tretyakov 2011.12.30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들을 뒤져보니, 갈수록 점입가경이로군요...

    덧 : 하지만 1940년에 중국에서 50-60원의 수입을 올렸다는 건... 중국돈으로 올린 게 아닐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에 따르면 쇼와시대 말-종전 전에 1엔의 가치가
    현재 돈으로 2000엔이라는 말이 있는데,(그래서 1엔 문고라는 게 잘 팔렸다고 합니다.)
    지금 수입으로 계산해도 저 정도 화대면... 도대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이어야 가능합니까...

    아무리 보아도 위안부 개인 하나가 육군대장이나 총리대신보다 잘 번다고 상식적으로 말하기 힘들 뿐더러,
    위안부라는 직종이 다른 사람이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중국인 집창촌 같은 걸 생각해 본다면....)
    아마 왕정위 정부가 발행한 화폐나, 일본 군의 군표로 50-60원이 아니었을까요.

    • MAUS.K 2011.12.30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죠. 그런데 문옥주 할머니가 1943년 3월부터 2년간 약 2만6천엔을 저금했었다는 사실이 소송 중에 밝혀진 것을 상기해보면 결코 중국 돈은 아니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당시에 일반사병은 1원 50전, 하사관은 3원 장교는 5원, 긴밤은 20원 하는 식이었는데, 하루 10~20여명 상대했다고 했다고 보면 전혀 불가능한 수입은 아니었죠. 군표라고 해도 현금과 다를 건 없으니까요.

    • Tretyakov 2011.12.30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혹시 삼천리지 원문을 볼 수 있는 곳을 아시나요? 원문이 일본어이고 円으로 나왔다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나 중국에서 쓰는 元, 圓으로 나왔다면 논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덧붙여 문옥주 할머니 증언 출처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주 거칠게 계산해서 하루 평균 3원X15명=45원,
      45원X30일=1350원, 1350원X12달=16200원인데...
      (수가 사병>하사>장교로 루트식으로 수렴하고,
      긴밤이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문제가 되는 건 여기서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했느냐,
      혹은 군표냐 현금이냐. 군표였다면 할인해서 엔으로 바꿨느냐.
      (군표의 경우는 아시다시피 전시에 국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시중의 화폐로 바꾸기가 힘들지요.)
      중국돈으로 받았다면 중국돈을 암환전업자에게서 바꾸었느냐...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 MAUS.K 2011.12.31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천리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검색이 가능하십니다. 국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원"으로 표기가 되었습니다. 문옥주 할머니의 경우 네이버 뉴스아카이브에서 검색 가능하시고요. 그리고 소화15년 일본 육군봉급령에 의한 관등별 봉급표를 보면 한자로 圓이라 단위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 대한건아 2013.02.23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ㅡ만약 돈을 글케 많이 받앗다면 과연 광복이후 어떻게살앗을까?머리가없냐? 억울한 사람들 더 아푸게하지말지?

    • 감사 2014.05.13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제시대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가 죽어라 고통만 당한 불쌍한 분들... 어쩌구 하는 인식이 있어서 이런 수입이 믿기지 않는 듯 합니다.

      요즘 업소녀들 수입이 얼마인 줄 짐작해 보시면 충분히 공감이 가실 듯 하군요. 지금도 연봉 순으로 하면 당연히 업소녀 >>> 대통령 >>> 육군대장 순입니다.

  5. 쪽바리 개새끼 2012.12.08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 나라 일본으로 돌아가서 마음껏 글 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