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12.01.09 00:36
5. 문○○ 할머니의 증언

문○○ 할머니는 1992년 시모노세키 우체국을 상대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을 제기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자신이 위안부로 근무했던 부대명, 도중에 머물렀던 여관의 상호이나 지명, 친척집 가게의 주소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만큼 영리하신 분이라 증언 내용도 구체적이고 상당히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분 역시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가감되거나 상이한 면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문할머니는 최초 정신대 피해 신고 당시에는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살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가기만 하면 일자리도 좋고 돈도 잘 번다』는 말에 속아 42년 7월부터 해방후인 46년4월까지 약 3년6개월여 동안「후미하라 요시코(文原吉子)」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따라 버마·태국 아유타야 등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1991-12-07자 참조)"
문할머니가 언급한 "안면이 있는 남자"는 다른 자료를 보면 마쯔모도라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宋씨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의 신고가 있고 나서 1년 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서는 느닷없이 1940년에 일본헌병에게 강제연행되어 중국 동북부 도안성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얘기가 추가되고 있다. 즉, 이 증언대로라면 문할머니는 1940년, 1942년모두 2차례에 걸쳐 위안부를 경험한 셈이다.

문할머니는 이에 대해 정대협 증언집 말미에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991년 최초 신고 당시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빼먹었는데, 그때는 부끄러운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남방(=버마)에 갔던 일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숫한 시기에 채록된『<証言>從軍慰安婦-女子勤勞挺身隊 / 伊藤孝司 著 / 1992』에는 중국 도안성에서 위안부 경험이야기는 빠져있다. 인터뷰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뒤에 나온『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 George Hicks / 1995』에서도 마찬가지다.

1992년 일본 법원에 제소된『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소송 법정증언』이나『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에서도 중국 도안성에서의 위안부 얘기는 없었다. 오직 정대협을 거치면서 일본헌병에 의한 강제연행 얘기가 추가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헌병의 등장이 전체의 증언 시놉시스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을까?

정대협著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실린 문할머니의 강제연행 당시의 증언을 본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내 또래의 다른 여자애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본군복을 입은 남자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우리를 력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기차이름은 아카쯔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내리면서 안동이나 봉천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 중국에 와서는 처음에 우리랑 같이 오던 남자는 어디론가 가고 그 후에는 중국말을 하는 남자가 우리와 내내 같이 갔다. .....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중국 동북부 도안성이라는 곳에 내렸다."
고찰1) 일본헌병은 빨간 완장을 차지 않는다. 흰색 완장이다. 완장의 글씨가 빨간색일 뿐이다.
고찰2) 아카쯔키는 경성(서울)이 종착지다. 그리고 조선에서 도안성까지 가는 열차편은 없다.
고찰3)『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일본인 헌병외에 조선인 헌병과 형사 3명에게 연행되고 있음. 갑자기 가해자 숫자가 불어나고 있다. 또한 역전에서 자신을 인수한 사람이 증언에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로 되어 있는데, 『버마전선..』에서는 이들이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형사로 둔갑해 있다.

할머니의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註) 출전 서지사항
① 정신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년
② 버마전선 위안부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아름다운 사람들, 2005년
③ 일본군대의 성노예 :『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George Hicks, 창작과 비평, 1995년
④ <証言>從軍慰安婦 :『종군위안부 : 남북 종군위안부 27인의 증언』, 이토 다카시, 눈빛, 1997년


자료1) 1940년 문할머니가 일본헌병에게 납치되어 헌병대로 이송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친구 하루코네 집이 화장터였으므로 납치가 자행된 이곳은 현재 대구광역시 남산4동의 남산초등학교 부근임. 당시는 시내에서 상당히 벗어난 외곽지대였는데 헌병대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대구지방 병무청 자리이므로 1934년도 大邱府全圖를 참조하면 대략 저런 납치경로를 추정해볼 수 있는바, 동선은 약 3.4km이고 이동시간은 성인기준 도보 40분~50분 정도의 거리임.

문제는 해질녘 오후 6시쯤 헌병이 대체 무슨 용무로 헌병대에서 도보 4~50분이나 떨어진 시외곽지역을 배회하다 우연히 발견된 소녀를 무슨 죄목으로 헌병대로 끌고 갔냐하는 것이며, 헌병대 안에는 이미 납치(?)된 또다른 소녀를 구금하고 있었다는데, 시골의 헌병분견소도 아니고 헌병대본부에서 어떻게 이런 인신매매를 태연히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불능하다.


자료2) 아카쯔키 급행열차 운행 구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료3) 부산발 급행열차 시간표 (1941년 조선열차시각표 참조하여 엑셀편집)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대협 증언집에서는 아카쯔키 급행을 타고 대구에서 곧바로 중국 도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위 열차시각표에서 보듯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신의주에서 환승하여 중국 동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의주는 환승역이 아니고 아카쯔키는 신의주까지 가지 않음


자료4) 문할머니의 전시우편 저금원부에 불입된 입금 내역 (이자를 제외한 원금불입)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츠모토는 우리들이 준 표를 받기만 하고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그리고 화장품 같은 것을 조금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우리들은 일치단결해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리더가 되어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마츠모토와 교섭을 했다. 그렇게 실력행사를 할 때만 마츠모토는 돈을 아주 조금, 1원이나 2원쯤 주곤 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씩 받은 팁을 모아 큰 돈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나만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다가는 안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무를 보는 군인에게 나도 저금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91p~92p
상기 증언을 살피건대 문할머니는 위안부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이 아니라 팁을 모아 저금을 했다고 한다. 입금일자를 보면 최초 입금일인 1943년 3월 6일 500원을 입금한 뒤로 불과 4개월만에 700원을 또 입금했다. 군인들 봉급이 전지증봉을 감안해도 월 30엔이 되지 않고 장교의 경우 150엔 미만인데 팁을 대체 얼마나 받아야 월 175엔 이상의 팁을 모을 수가 있는지 미스테리한 일이다.

일본 법원에 제소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판결문을 보면 "매일 저녁 수입한 군표를 문옥주 등은 마츠모토에 건네고 한달에 1번 그 반액을 현금으로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위의 책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반된다. 어느쪽이 맞을지는 돌아가신 그 분만이 아실 일이다.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이런 초보적인 검증을 살피지 않은 정대협과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밖에...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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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nowski 2012.01.09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점점 더 아스트랄해지네요....

  2. 강희대제 2012.01.10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참 치밀하시군요..;; 3~4일만에 내놓는 포스트신데 어디서 저런자료를 다 구비하신건지..;;

  3. 무애자 2012.01.10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 모 할머니의 경우 "군표를 받아 당시 돈 1만여원을 저금했지만 버마에서 통장을 분실했다"

    " 술취해 들어온 일본 군인이 칼을 빼들고 행패를 부리자 그 칼로 일군을 죽였다가 군종재판에 회부되기도 했고 그 직후 일주일만에 다시 위안부생활을 되풀이해야하는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고 하더군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521245

    • MAUS.K 2012.01.11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버마전선..』저서를 보면 통장은 버마에서 분실한게 아니라 핸드백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예금청구권의 실효로 오인하여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기간을 놓쳤다고 되어있습니다. 말이 또 달라지는군요.

      군종재판 회부건은 그 팩트 여부를 좀더 확인해봐야겠죠. 『버마전선..』에 당시 상황이 기술되고 있는데, 일본의 전시 사법제를 고찰해보면 할머니의 증언에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다 다루려면 제가 책을 써야 하려나요?

  4. 지나가다 2012.01.15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심각하군요. 이렇게 엉성한 자료를 가지고 일본에 소위 클레임을 제기하려고 했단 말이죠? 제가 일본이라고 해도 도망다니겠습니다. 한국 학계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상태에서는 일본이 위안부 책임 없다고 발뺌해도 할 말도 별로 없고, 또 우리 입장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진상 파악이 안되고 공상소설만 쌓여갈 수 밖에 없는데 말이죠. 이명박 이번에 일본 가서 제안 괜찮게 던지고도 별 성과 없이 돌아온 게 다 이유가 있겠군요.

    이 상태라면 매주 할머니들 데모장에 데리고 오는 단체들 제정신이 아니군요.

    • 나츠메 2012.01.21 0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1. "한국 학계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귀하께서 이미 답을 알고 계십니다. 한국 사학계는 역사학을 가장한 "공상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2. "매주 할머니들 데모장에 데리고 오는 단체들 제정신이 아니군요."

      제정신이 아니죠.

      위안부 피해자들을 거리로 동원하는, Nationalism에 입각한 일제의 전시동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위를 시전하는 것이 바로 <정대협>이란 시민단체입니다.

      그들은 "민족"이란 이름의 <동원령>을 통해 피해자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재현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통해 다시 민족적 내러티브를 강화하여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지요.

      이미 식민지 시대 종결 후 60여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피해자들에게 식민지 시대의 위안부이길 강요하고, 그 끔찍한 치부를 끊임없이 노출시켜 다른 시민들에게 각인하는 정대협이야말로 민족의 '포주'이고, 피해자들은 '21세기판 위안부'라 할 수 있음.

      이처럼 20세기에 '성적 도구'로 이용된 위안부들을, 21세기에 새롭게 '민족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저 쓰레기 같은 <정대협>입니다.

    • 과객 2012.01.25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감성, 정서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안부 할머니들 동원하면 기자들은 감성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기사 쓰고. 그럼 문제의 본질 같은것은 안보고 그냥 일본 나빠요 만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할머니들 춥거나 아파서 못간다고 하는 것도 강제로 동원하는 인간들도 있다 합니다. 듣기론 거의 반 협박조라 하더군요.

      위안부할머니들을 팔아넘긴 조선인 포주나 직업소개소도 나쁜인간들이지만 지금와서 할머니들을 또 이용해먹는 정치꾼들은 더나쁜 인간들입니다.

      노인분들 아픔을 두번 세번 기억해서 더 아프게 만들고 그걸로 표얻을 생각이나 하는 양아치들이죠.

  5. 정말 2012.01.24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제는 일당주고 데모시키는 놈들이 문제입니다
    위안부를 팔아서 정치적 이익을 취할려는 양아치 정치인들이 없어져야
    실체적인 진실과 사실을 직시할수가 있다고 봅니다

  6. 2012.01.2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2012.02.08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맑은강물 2012.02.09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군위안부 문제의 이면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니 충격이군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종군위안부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과객 2012.02.19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65년 이후로도 한국은 일본 정부로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배상하지 않는 명목으로 자금을 받아갔습니다. 98년부터는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쌀과 곡식, 가전제품 같은 물자를 받아갔고요.

      분명 65년의 조약으로 계약이 끝난 것인데도 한국에서 징징대기에 어쩔수 없이 일본이나 일본 정부가 인도적으로 지원은 해주었습니다만, 계속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이 비양심적으로 행동한다면 일본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앉아 있을까요?

      더구나 일본내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이 일본극우,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욕까지 먹어가면서 아시아여성기금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치료, 진료, 생계지원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것을 거절한 것은 한국의 여성단체였습니다.

    • 검둥개 2012.12.09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객/

      표현이 왜 그러십니까? 징징대다뇨?
      자국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말씀하시는 논리는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흡사 일본인이 일본 입장에서 써 놓은 말 같네요.

      혹시 일본분이시라면 지레 한국분이라 생각한
      제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국적이든 위안부 문제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스스로 지식인이라 생각한다면 말을 함에 있어
      한번 더 생각 하시시는 것이 스스로 얼굴에 침을
      덜 뱉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9. 행인1 2012.07.05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정대협이 불쌍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동원해서 얻으려는 이익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10. 미카엘 2012.12.26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대구 사람인데요 지금의 대구 남산초등학교에서 병무청까지 3.4km차로 가면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요
    배회하다 납치 한것이 아니라 헌병대 차량으로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요?

    물론 대부분의 종군위안부는 납치보다는 취업사기를 통한 것으로 봅니다

  11. 미카엘 2012.12.27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걸어서도 충분합니다
    남산초등학교는 남산4동이 아니라 남산2동이며
    3.4km가 아니라 병무청까지 1.64km 입니다

    보통 천천히 걸으면20분이상 걸리며
    빨리걸으면 15분도 가능합니다

    택시를 타더라도 2400원기본요금만 받습니다
    제가 남산초등학교에서 매일신문사 부근 계산성당은 직접 걸어가본적있는데
    매일신문사에서 조금떨어진곳이 병무청입니다
    지금현재 교통신호등을 포함하여 이렇지만 일제당시에는 도보기준으로 더빨리 갈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네이버에서 거리를 검색해보았습니다
    총거리 1.64km예상시간 25분 나옵니다

    • 眞明行 2012.12.28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을 잘 읽으시라고 누차 말씀드립니다. 현대지도가 아니라 고지도를 꺼내놓고 설명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당시는 저 길이 요즘처럼 잘 닦여진 신작로가 아니라 꾸불꾸불한 산길이었습니다. 저 지도는 캐드를 이용하여 거리를 측정한 결과 3.4km 정도로 계산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남산4동이라 함은 남산초등학교를 얘기한 것이 아니라 남산초등학교 건너편의 화장터가 남산4동이란 뜻입니다. 해질녘에 시외곽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곳에서 여자 아이 하나 잡자고 헌병대에서 출동했다는 얘기를 믿으라는 얘깁니까? 지금?

      화장터 인근인 대명동 화엄사에서 중구 포정동 병무청입구까지 현대지도하에 최단 거리 검색하면 2.64km고, 큰길로 가면 3.11km 나오는거 다 확인했습니다. 자꾸 이런 지엽적인 걸로 시비가 붙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12. segi 2016.01.26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독증 환자들이 너무 많군요....ㅋㄷ
    이런글에 답글을 달기위해서는
    비동기적인 문답 같은 답글 퀘스트를 두어야 할 듯....

  13. segi 2016.01.26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독증 환자들이 너무 많군요....ㅋㄷ
    이런글에 답글을 달기위해서는
    비동기적인 문답 같은 답글 퀘스트를 두어야 할 듯....

  14. 레닝 2016.02.01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혹시"일본 법원에 제소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판결문"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님이 언급하신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인용은 많이 돼있는데 일본 사이트를 다 뒤져도
    관련된 출처를 알수가 없네요.

    구글링하다보니 일본인들끼리도 출처에대해 설왕설래하던데.. 혹시 확인되는 자료가 있으면 답글부탁드리겠습니다.

    • 眞明行 2016.02.0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판결문이 아니고 소송장의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인용문의 출처를 따로 기록해놓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실제로 저런 재판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체국에 환불을 청구했다는 얘기있고, 반환소송을 추진하겠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소송까지 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옥주가 실제로 소송에 참여한 것은 김학순이 1991년 12월에 동경지법에 제기한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의 일원으로 포함된것만 확인되었습니다. 아마도 저 소송장 내용이 맞다면 김학순이 동경지법에 낸 소송에서 증언자로 참여한 내용일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추서를 할 기회가 온다면, 다시 자료를 보강할 생각이고, 일부분의 오류나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5. 붕어 2019.08.06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식이면 법정에서도 받을 것도 못 받을 수준이 될것같내요. 믿을만한 증언이라 주장하기도 힘들어지니. 누가 이따위로 중요한 증언조차 재대로 기록 못했는지 그리고 누구 말대로 토착왜구가 아닌지 확인해야될 것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