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항.쟁 2010.05.18 01:39

5.18은 이제 국가차원에서 공식적으로『광주민주화운동』이라 명명하고 있다. 역사란 해석의 관점을 다양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세력일수록 이 공식명칭에 대한 애착이 깊은 것 같다. 혹시나 누군가가 아직도 5.18을 광주사태라 부르거나 그때 죽은 이들을 폭도라 지칭한다면, 그들에게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용어가 주는 타협적 뉘앙스마저 거부하는 일단의 세력들은 아직도 광주항쟁이란 용어에 집착한다. 광주항쟁의 변증법적 대립의 척점에는 광주학살이 자리잡고 있다. 이 둘을 대비시킴으로써 민중과 권력, 탄압과 저항,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사상적 지향점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역사란 게 그렇게 단순할까?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5.18은 민주화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그렇다고 항쟁이 될 수도 없다.  5.18 당시 일부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제외하면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시국에 대한 어떤 뚜렷한 인식의 제고도 없었다. 그것은 5.18 직후에 치러진 총선 당시 각 정당별 지지율만 보더라도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적어도 5.18 이후 김대중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평민당 총수로서 국회에 입갤하기 전까지는 호남지역은 여전히 여당이었던 민정당 지지율이 제1야당을 상회하는, 심지어 영남지역보다 더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범시민적 "운동"이 호남전역을 휩쓸었고 민중의 각성이 바탕이 되었다면 적어도 이런 촌극은 연출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식자(識者)들의 생각은 다르다. 역사의 평가라는 것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진실의 페브릭을 편집하는데 있지 않음에도, 누군가의 구미에 맞는 주장과 논리들을 끊임없이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논저들은 식상하기 짝이 없는 흑백톤이 난무한다.

사건의 배경보다는 얼마나 많이 죽었고 어떻게 죽었고 진압군이 얼마나 짐승같았는지 디테일하게 찍어내는데만 급급하다. 그러다보니 거짓증언들이 여과없이 쏟아져 나온다. 사료검증 따위는 어차피 그들에게 관심밖의 문제이다. 5.18에서 학살론이 지배적인 코드가 된 이유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학살이란 무엇인가. 명동 한복판을 한가로이 걷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아무 영문도 없이 마구잡이로 쏘아죽이거나 땡크로 깔아뭉기는 그런 상황을 우리는 학살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학살이라 볼 것인가에 대해 좀더 명확한 개념의 설정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첫째, 가해자의 고의성이다. 처음부터 살해할 목적을 띠고 구체적으로 이를 계획한 후 실행에 옮겼다면 고의성을 충족한다 할 수 있겠다. 둘째, 피해자의 무저항성이다. 무장단체가 교전 중에 희생을 당했다면 이를 학살이라 보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다. 셋째, 인명피해의 범위성과 규모성이다. 고의성을 가진 가해자가 무저항의 피해자들을 대규모로 살상했을 경우, 시간차의 여부를 막론하고 희생의 양태나 수단 등이 어떤 일관성을 가진다면 그것을 우리는 학살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견지에서 보았을 때 5.18을 과연 광주학살로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첫째, 가해자의 고의성, 즉 발포명령을 사전에 기획하고 또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피해자의 비폭력, 무저항성 상태였는지 역시 의문이다. 진압군의 집단적 발포가 있기 전, 또는 이와 동시에 광주를 비롯하여 그 외곽지대에서 무기탈취와 무장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무저항성을 인정할 수 없다. 셋째, 사망자의 대부분은 교전이나 진압 중에 발생한 것이다. 교전과는 무관하게 희생당한 사례 중에서도 고의성이 보이지 않는 사례, 즉 진압현장에 있다가 유탄에 맞아 숨지거나 오인사격으로 희생당한 경우 역시 학살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압군이 교전의 현장에서 이성을 잃고 홧김에 양민을 즉결처형한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 단순히 사람이 많이 죽었으니까 학살이라 주장하는 바가 과연 타당한지 의심스럽다. 그 대표적인 것이 광주학살에서  자주 거론되는 지원동 주남마을 학살사건이다.

광주광역시에서 공식 편찬한『5.18민중항쟁사』를 보면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대에서 철수한 11여단 및 7여단 33, 35대대는 22일 오전 6시경 지원동 주남마을 지역으로이동을 완료하고, 광주-화순간 도로 및 너릿재 터널을 차단하는 등 광주봉쇄작전에 돌입하였다...(중략)...그리고 이곳 역시 예외없이 계엄군의 살상극이 벌어졌다.

① 23일 오후 2시경 공수부대가 정차명령을 무시하고 지나가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하여 탑승자 18명중 15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3명을 생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더욱이 계엄군은 부상자 3명 중 어린 여학생이던 1명을 제외하고는 남자 2명을 리어카에 싣고가 산 속에서 즉결처분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② 한편 그날 오전 9시경에는 지원동 녹동마을 입구 화약고앞 도로상에서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집중사격을 가하여 탑승자 11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①과 ②는 같은 사건인데도 기술자가 착오하여 별건으로 취급한 것이다. 즉, 진압군 작전일지와 상황보고서 등에 기재된 사건발생일시가 오전 10:00~ 11:30으로 일정하지 않고, 당시 생존자인 홍금숙은 오후 2시로 진술하고 있어서 발생한 착오다. 수십명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참여하여 발간한 공식 자료가 이 모양이니 나머지 저술들은 얼마나 형편없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아 보인다.

광주-화순간 15번 국도 인근 지원동은 석산(石山) 독립가옥에 TNT가 보관되 있기 때문에 진압군과 시민군이 치열하게 교전했던 곳이다. 이미 그 전날인 22일부터 트럭이나 버스로 무기고를 탈취하기 위해 돌진하는 차량들과 교전이 발생했다.

치열한 교전의 와중에 어린 학생들과 주민들이 유탄이나 오인 사격으로 숨지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에는 평화롭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와 농부를 향해 진압군이 조준사격하여 고의로 죽였다고 하는 모양인데 사실이 아니다.

아무런 전후 맥락이나 배경지식 없이 이『5.18민중항쟁사』를 읽은 사람은 평화롭게 버스를 타고가는 시민들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차별 때려잡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버스를 탄 사람들은 양민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군들이고, 일부 여학생들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도청 앞에서부터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다.

당시 생존자인 홍금숙의 자술서를 보자.
홍금숙의 최초 진술을 보면, 10여명 이상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총 10여정과 실탄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버스에 있었던 모든 남자들이 무장을 했다고 봐야 한다. 통행 목적도 이 책에서 기술한대로 광주-화순을 개인용무로 오가는 멀쩡한 양민들이 아니라, 주남마을에 있던 화약고와 무기창고를 털기 위해서 경계병력을 버스로 뭉개버리려다 사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학살"이었다고 볼 수가 있을까?

당시 전교사의 작전상황일지를 본다. 미니버스 총격사건으로 다수의 시민군들이 사망하자, 시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후 3시 30분경 무장한 50여명이 버스를 타고와 진압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들의 대치상태는 5월 24일까지 계속되다가 수습위원들이 설득으로 대치를 풀고 귀가했다고 한다.

5.18이 제대로 진상규명 되려면 이 사건을 가로막고 있는 민중민주주의적 시각들을 속히 떼버리고 사실로서만 역사를 다루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장공비 사살 사진을 가리키며 광주학살 사진이라고 청문회 때 뻔뻔하게 주장했던 사람은 교육부장관에 총리까지 해먹고 지금은 편안하게 골프나 치러다니신다.
광주를 팔아 치부하고 보스정치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몰랐던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역사적 진실을 규명할 의지를 보기는 쉽지 않다. 전두환이나 그들이나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모순들이 극복되지 않는한 미증유의 역사적 비극들이 또다시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는 역설적 구조에서 우리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다.

전두환 하나 지옥에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Posted by 眞明行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shaind 2010.05.18 2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학살도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렇다치더라도 단지 시민 대다수가 전두환 이름도 몰랐다는 점을 들어 항쟁이 아니라고 하는 건 좀 그렇네요. 시위대 내지는 시민군이 사전에 철저하게 조직되고 교육된 것도 아닌데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죠.

  3. 도르래 2010.05.18 2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18 당시 일부 지식인들과 학생을 제외하면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시국에 대한 어떤 뚜렷한 인식의 제고도 없었다. 그것은 5.18 직후에 치러진 총선 당시 각 정당별 지지율만 보더라도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궁금합니다. 제가 알기로 80년에는 총선 자체가 안 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샤치홐 2010.05.18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gall.dcinside.com/history/436707
      참조 되실까 모르겠네요.

    • 無名氏 2010.05.18 22: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81년 총선 결과 참조

    • 도르래 2010.05.18 2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우선 11대 총선이 중대선거구제 였다는 점(득표율 20%만 되도 당선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정권 차원에서 온갖 부정투표(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조작, 유권자 매수 등등)가 있었다는 점, 당시 야당인사들의 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어 관제야당들이 난립했다는 점 등은 님이 링크한 글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엔 85년 자료도 있던데 역시 여당이 1위더군요. 정권 차원에서 온갖 불법선거를 자행했음에도 야당이 그 정도 지지를 받았다는게 전 더 신기합니다.(농촌 지역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워낙 교육수준도 낮고, 기본적으로 농촌 사람들은 '여당' 성향이었죠) 그런 텍스트 밖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선거 결과만 가지고, '80년 광주는 미화된거고,호남의 야당성향은 조작된거다'란 주장의 근거로 차용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진 않습니다. 그 역시 자기 편한대로 근거를 차용하는거에 불과할테니 말이죠.

    • 無名氏 2010.05.18 23: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선구제 드립 또나오네? ㅋㅋㅋㅋㅋ
      온갖 부정투표가 여당을 1위로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조작이라도 있었나보지요?
      근거없음 말을 하지 마세요.

    • 도르래 2010.05.18 2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고로 60년 총선도 여당이 1위했습니다. 님 기준대로 한다면 60년 총선에서 여당이 1위한건 온갖 부정투표가 만들어준게 아니겠군요. 당시 4.19항쟁에 나선 국민들은 그럼 정권이 조작한 것도 아닌데 "부정투표" 드립을 치면서 경찰하고 싸운거구요.

      아니 제가 말하는게 무슨 저 혼자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인데 말이죠.(예를 들어 제가 말한 부정투표 사례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7년에 92년까지 선거개입이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사례입니다)

      뭐 중대선거구제 얘기야 님이 동의안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부정투표가 실제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81년 총선 결과를 그대로 '민심'으로 믿는건 무리한 거라고 봅니다.

    • 無名氏 2010.05.18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60년대처럼 80년대도 똑같았을거라는 증거를 대시라고요.
      부정선거 드립은 김대중이 대선에 떨어졌을 때도 나왔던 얘기고요..
      그게 당락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중대한 부정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가능할 때만이
      그 주장이 설득력있는 겁니다.

    • 銀王 2010.05.19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정선거 얘기란게 정권이 바뀔때마다 야당측에서 나오는 단골레파토리기도 하죠

      한가지 사례로 예전에 보수단체에서 민주당이 전자개표기를 부정조작해서 노무현이 당선됐다는 소릴 하다가 허위사실유포로 손해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 도르래 2010.05.19 0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81년 총선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 부정투표가 당락에 영향을 미칠정도 였는지는 님 말대로 증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권 차원에서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81년 총선' 결과를 그대로 '민심' 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부정투표가 없었다면, 당락이 바뀌었을지는 모르는 거지만, 적어도 당시 개표결과가 (조작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확한 민심이 아닌 것은 분명한거 아닙니까?

  4. 제3의사나이 2010.05.18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정도의 '이의제기'에도 흥분해서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군요.
    휴...일제시대의 이야기는 뭐 더 흥분해서 달려들겠지요...
    자신들이 알고 있던 지식에 반(反)한다면 무조건 왜곡이나 거짓이라고 생각을 하니 원;;;

    • 銀王 2010.05.18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전두환이 그냥 광주시민들 학살 지시했는데 뭔 소리냐?" 이런 수준의 얘기도 있습니다만
      학살의 개념에 대한 이의 제기 정도라면 괜찮은 걸로 보입니다

  5. 궁극사악 2010.05.18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저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쪽 전공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의 범위를 조금 좁게, 그리고 그에 대한 정부의 진압범위를 조금 넓게 보신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그당시 쿠데타 정권 측에서, 희생을 줄일 방법이 있었다면 찾아보고 유화책을 사용하는 등의 노력이 선행되었는지 궁금하네요.

    물론, 5.18 민주화 운동 당시에 있었던 일을 찬양, 미화하는데서 벗어나 좀 더 객관적 시점에서 돌아봐야 하지 않는가라는 점에서는 100% 동의합니다.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은 발전적 논의를 위해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는 덧글들이 있는 것이 좀 아쉽네요.

    • 無名氏 2010.05.1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문에 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에 따라 시민의 저항과 권력의 정당성간에 상관관계는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사안이지요. 제 생각에는 부마사태가 장기화된 여러가지 정치적 배경과, 신군부에 줄을 대려는 상급지휘관들의 경쟁심리 같은 것도 같이 작용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6. 銀王 2010.05.18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굽시니스트씨 글과 이 글 밑에 주르륵 달린 추천평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파쇼국가가 맞는듯
    무언가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신성한 가치가 존재하고 그 영역을 침범하면 개색기가 되는 국가

  7. 인민해방군 2010.05.18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따! 거시기 워~쩔라고 이런 글을 올려부렀디야? 강주 사람 보믄 마빡 도끼로 찍어부린당께!?

  8. 無名氏 2010.05.18 2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합리적인 반론과 토론은 환영하지만, 빈정거리기 위해서 댓글을 다시는 분들과 뻘플 싸질러 대시는 분들은 바로 조치를 해드리겠습니다. 댓글 차단 당하신 분들에게는 사죄하는 뜻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소급해서 삭제해드리고 있습니다.

  9. 2010.05.18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無名氏 2010.05.18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네 북괴군 출몰설은 제가 사양합니다. 전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라.

    • 인민해방군 2010.05.18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100% 북괴군이 왔다 하는건 무리지만, 그렇다고 100% 아니라고 하기에도 찜찜합니다.
      어느정도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놈들이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극렬하게 선동하고 총알받이로 내세웠다는 가설이 입증되면 스토리의 전체적 부분이 완성되는듯 합니다.

    • windmill 2010.05.19 0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monthly.chosun.com/ept/view.asp?C_CC=A&C_IDX=3993&tbKey=CGJ
      북한개입은 가망성이 영 없어보입니다

    • 인민해방군 2010.05.19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windmill // 북괴군 개입설은 지만원 박사가 전파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김대중, 노무현보다도 더 미워하는 지 박사와 조갑제 기자가 같은 의견을 낼 리가 없지요...

  10. 키린 2010.05.19 0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치가 자행한 유태인 학살의 사망자 수를 가지고 독일에서 논란이 일었던게 오버랩되네요.
    30년전 역사를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일단 가/피해자간의 감정이 가라앉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따로따로 행사를 치루지 않았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가해자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피해자측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하기위해서는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상황에서는 폭동이냐 민중항쟁이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11. 2010.05.19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2. 인민해방전선 2010.05.19 0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찬 사진드립 유명하죠 대간첩(울진삼척) 작전 장병들이 국회에 와서 항의했다죠..

  13. 캐안습 2010.05.19 1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당시 왜관에 집결해있던 북조선군을 미군 B-29가 폭격한 것도 학살이라고 주장하는 괴랄한 사람들도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항할 수단이 없는 상대를 그 대항못하는 수단으로 공격하는 건 비겁한 거라나 뭐라나.

  14. 공손연 2010.05.19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기들 입장에 반하면 상대를 사문난적으로 몰고 자기머리속에 생각하고 싶은대로 비약하고 중상모략하는게 바로 한국인들의 중세적인 습성이지요

    그러니 같은사건을 보아도 보는 시야가 서로 차원자체가 다른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개념을 합의하에서 도출시킬 노력이 결여되다보니 온통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건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보면 북한기준에서는 북한이 강성대국이지요. 국력을 객관적으로 판별하는 GNP나 GDP같은 지표나 수치와는 동떨어진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자존심을 만족시킬 그만의 기준말입니다.

    옛날에 일본에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이가 똑같이 일본과 히데요시를 봐놓고도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주장한게 그냥 그런게 아닙니다. 중세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과 이기심을 절제할 방법인 현상을 인식하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성리학은 현상을 바라보고 논리를 수정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기이원론이고 주리론이고 자기머리속에서 시작해서 자기머리속으로 끝나는 논리이다보니 그렇고 그걸 국시로 삼고 사상적으로 강제했으니 그런세상에 살던 사람들은 어쩔수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그 여파가 남아있다는겁니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구분못하고 박정희를 모택동수준으로 보는가하면 아무리 못마땅해도 가카를 히틀러에 비유하거나 친일파기용문제를 전체주의적인 현상인 나치즘채택과 문혁에 비유하는 인간들마저도 있습니다. 지딴에는 공통적인 개념있다는 식이지만 비유라는게 그런개념만으로 성립이 될리가 있을까요? 보면 뻔한것조차 못보는 꼴이 한심스럽습니다.

  15. 엽기당주 2010.05.19 15: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18의 성격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글이네요.

    이 사건의 의미를 자기 입장에따라 해석하는것은 좋지만 접근법 자체를 '악'으로 모는건 학문적으로나 민주적 토론이라는 의미에서나 매우 좋지 않군요.

    자신을 진보라고 칭하는 파시스트들이 이글루스에 넘쳐나는것 같습니다.

    암튼,

    마지막 '전두환 하나 지옥에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라는 말씀이 참 와닿습니다.

    사실 기존의 5.18에 대한 개념으로는 전두환과 그 일파를 악의 세력으로 분류한 뒤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웠습니다만 과연 그들만 잘못이 있을까요?

    방조한 이들은?

    은근히 바란 이들은?

    이분들은 면죄부를 받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신성화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시는듯.

    당시 돌아가신 영령들의 무덤들만 말이 없군요.

  16. Mediocris 2010.05.19 16: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생각해도 "전두환 하나 지옥에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라는 너무도 지당한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전두환이란 아바타가 광주사태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라는 악의 화신이 광주사태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양분하여 사태의 내밀한 부분을 들여다 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암초로 작용하고 있으며, 광주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이용하고 있으며, 이용하려는 희생의 세습자들에게 일종의 방어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사태에 관해서 어떤 대학교수도 '기억의 신성화'를 이용한 특정지역 정치세력의 집권과정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젊은 진보를 잠칭하는 광우병 촛불 세력 부류들의 인민재판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광주사태를 규정하는 악의 아바타는 전두환 하나 뿐이 아니라, 광주와 관련되어 이익을 도모한 광주 이후의 모든 '사악한' 세력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17. maxplaza 2010.05.19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역사는 재평가받는 것이 옳은 일이며 무명님의 글이 또한 그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북괴군 출몰설에 대해서는 부정하신다고 하셨는데 물론 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 특수부대를 남파시킨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니 저도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만... 특수부대와 같은 전투집단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남한내의 간첩들이 광주 내에서 준동했을 가능성은 꽤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 당시 벌어진 상황 추이를 복기해 보면 누군가 이런 소요사태를 일으키기 위한 공작을 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히 질서가 무너져간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또 북이란 집단 자체가 이런 천재일우의 찬스를 놓칠 우둔한 집단이 절대 아닐것이라 확신하구요...

  18. sulzip 2010.05.19 2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김대중이 호남민들을 선동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라는 듯이 말씀하셨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호남의 공화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던 이유는 호남민들이 죽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전두환을 지지했기 때문에 민정당의 지지율또한 높았던 것이 아닙니다.(다만 전국에서의 반 쿠데타 데모와 맥을 같이해 호남 각 지역 진보적인 대학생들의 시위는 각지에서 일어났음.)
    사람들 간의 소통 수단이 일방향적인 TV나 신문뿐이었던 당시, 5.18 직후에 반역자 전두환이 5.18을 북괴의 후방교란으로 선전하였기 때문에 호남민들조차 광주에서 어떻게 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반정부의 반 자만 입밖에 내어도 쥐도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려가던 시절이라는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1980년 이후 5.18이 어떻게 된 것인가 입소문으로 퍼지고 나서야 호남 전체에 광주의 진실이 알려지고, 그 지역 인물인 유명 야당인사 김대중을 국가반역자 전두환의 대항마로 내세운 것입니다.

  19. 인민해방전선 2010.05.20 0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입진보 진영에겐 5.18은 현충일 입니다.. 한국전은 객관화라는 미명하게 비판에 주저하지 않으면서 5.18 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시선조차도 거품물며 오버디팬스 하는 꼬라지들 보면 솔직히 역겹기 조차 합니다.

    버스 몰아 경찰을 죽이고 APC탈취하여 군인을 깔아 뭉게 죽이는건 아무것도 아닌듯 합니다.
    계엄군간 교전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나올정도였는데 시민군간 교전이나 오인사격 따위는 아무렇지도
    안게 넘어가고 이게 다 계엄군 탓이라고 하니 거참...

    화려한 영화따위를 진실이라고 믿는 애들 주변에 널리고 널렸죠..
    이것이 팩션이라고 애써 홍보하지 않죠.. 오히려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믿게끔 하려고 노력하는게 더 많이 보입니다.

    당시 신문기사만 보더라도 정부 당국의 발표에도 볼수 있는게 비폭도와 폭도에 대한 구분이
    있엇단 말이죠.. 또한 희생자에 대한 보상 대책(폭도는 제외)도 수립되어 있었구요...

    5.18 당시 민주주의 보여준 사람들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시민대표들이지
    끝까지 싸우자고 한 폭도들이 아니란 말이죠.. 이런건 기본적으로 분류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20. 인민해방전선 2010.05.20 0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중속에서 고첩의 활동 개연성은 존재할수 있으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라고는 볼수
    없다고 전 봅니다. 또한 입증된 사실이 아님으로 확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의 남해안쪽으로의 해안가 잠입 능력은 이미 증명된바 있으니 어느정도
    개연성은 존재한다라고 보지만 5.18에 개입하기 위해서 잠입하기는 사실상 힘들다고 보입니다.
    이미 잠입해 있는 고첩들이 활동하거나 정보 수집을 했는 정도 였을 겁니다.

    북한 개입설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라고 생각됩니다.

    • 삿갓이요 2010.07.22 0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5.17 군사쿠데타로 국가의 모든 기능이 반역자 전두환의 신구부 세력에게 모두 장악당했는데 그 상황에서 경찰과 군인을 죽은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헌법에 명시된 시민저항권은 이럴때 쓰라고 있는거에요. 이사람아; 설사 북한에게 남한정부가 장악당해도 '경찰이고 군인인데 죽이면 안돼지' 이럴껍니까?

    • 백범 2010.07.23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에 삿갓이요/

      5월 1일부터 15일까지 지상 서울역을 점거하고 상점하고 택시를 부수고 가로수를 꺾어버렸던 15만명의 대학생들이 5.17 비상계엄 유도에 과연 1%도 영향을 안 주었을지 의문이군요.

      컴퓨터도 없던 시절, 무슨재주로 경찰내부 기밀까지 빼돌려서는 순식간에 빠져나가더만...

  21. 와호잠용 2010.05.21 2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보문고에서 구할 수 있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탈북군인들이 수필형식으로 쓴 글인데 북한의 실정도 이해할 수 있고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근.현.대.사 2009.09.26 22:11
예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절찬리에 방영했던『Man vs Wild』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이 직접 오지나 극한지역에서 고립된 상황을 재연해가면서 이를 극복하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내용들인데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기억이 안난다면 아래 짤방을 보시면 아실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먹어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저런 건 약과이고, 썩은 동물의 시체에서 구더기를 잡아먹는 방법을 시전하거나 코끼리 똥에서 식수를 취수하여 마시는 법을 가르쳐준다. 이 다큐멘터리는 일종의 설정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전개하기 때문에 아무리 엽기적인 방법이 동원된 생존법이 제시되더라도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다.

차라리 영화『버디칼리밋』과 『얼라이브』는 실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모질고 강인한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겪었을 극한상황들에 대해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사람의 인육을 먹으면서 영하 40도 이하의 혹한에서 72일을 생존할 수 있는 치열한 의지력은 나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긴 뻑하면 단식투쟁을 일삼으면서도 토실토실하게 살이오른 우리나라 정치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오래 전에 인간은 얼마나 극한의 상황을 견딜 수 있는지 인체실험을 하신 분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남기신 자료들은 대부분 폐기가 되었지만 동상 관련 실험 자료들은 몇몇 남아있다. 우연히 찾아보게 되었는데 보니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이 동상에 가장 저항성이 강하고, 반대로 노인일 수록 약하다는 실험결과였다. 또한 밥을 든든히 먹은 사람과 따뜻한 목욕을 한 사람이 동상에 더 오래 버틴다고 한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게 아니니 믿을만(?) 하다.


<표1. 연령별 동상저항지수 실험결과>


<표2. 諸 생활조건의 동상지수 실험결과>
이 자료들을 보니,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면 밥을 든든히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해야하며, 그럴 여건이 안되면 몸을 많이 움직여 체온을 따뜻하게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자료를 제공해주신 731부대에 감사(?)드린다. 피실험자수만 101명이니 저 실험을 하면서 대체 몇명이나 죽인건지는 알 수 없다능..
Posted by 眞明行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백범 2009.09.26 2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을 굶고도 생존이 가능한지도 좀...

    • 無名氏 2009.09.26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단식투쟁 많이 하시는 정치인들에게 물어보심이 가장 빠를듯..
      손수 자기 몸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으셨으니 아마 정확할겁니다.

    • 백범 2009.09.26 2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요즘 정치가들의 단식은 음식을 끊는게 아니라 간단한 식사, 단촐한 식사의 약칭이라서...

      http://baekbeom.egloos.com/3323621

  2. 我行行 2009.09.26 2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탈을 쓰고 해서는 안될 짓을 한 집단이었습니다.

  3. 은붕어 2009.09.26 2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인을 군대로 편성할 게 아니면 저런 가학적인 장난은 왜 쳤을까요? 그나마 15세 이하 애기는 편성 안 한 것만 해도 다행일까요...
    밥 먹인 거나 실온/온욕 같은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요.

    위에 언급하신 TV 프로는 못 봤는데, 근데 사람의 경우 대변 무게의 60% 가량은 장내 세균으로 알고 있는데 저 특수부대원은 알고 식수를 채취한 그런 겁니까;; 또 얼룩말(?!)이나 저런 오지의 생선 같은 경우 희한한 기생충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이 최종숙주가 아닌 경우 몸을 헤집고 다닐 거 같은데 ㄷㄷㄷㄷㄷ;
    실제 조난당한 것도 아니면서 설정을 위해서 저렇게까지;;
    쩝... 돈 벌기도 무척 힘듭니다.

    • 돚거노인 2009.09.26 2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람빼고 나머지 독없는 생물체는 다 먹는듯 합니다. 대략 쿨하신분....ㄷㄷ

    • 無名氏 2009.09.26 2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혹시 구충약이나 항생제쯤은 미리 먹고 했겠지요. 보험에도 들었을테고요.
      2. 듣자하니 731부대의 동상실험은 소련과 시베리아 일전을 염두에 두고 했다고 합니다.

    • 백범 2009.09.26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요. 사람 고기도 먹을 겁니다.
      (심장 약하신분 아래글 패스...)

      동네 어르신들 말씀 듣기론, 6.25때 오래 굶다보니 사람 사체나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어떤 피부병환자들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고도 하고요.

    • organizer™ 2009.09.27 0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범 / 피부병 환자는... 아니고... 특정 질병인데, '문둥병'(나환자)라고...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전혀 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고칠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 때는 전혀 약이 없었으니까...]

  4. 한뫼 2009.09.26 2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러다가 새로운 질병의 매계체가 되는 것은 아닌지...

  5. 武究天尊 2009.09.26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 안먹으면, 음식 섭취안하면, 잠 안재우면 등등 여러 극한 이야기들이 있겠습니다만 신체의 극한만큼 짚어볼게 정신적, 심리적 극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구봉광산 생존자나 그 기록깬 삼풍사고 생존자들 보면 인간이란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베어그릴스의 화끈한 식성이야 뭐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것이겠지요. 써먹을일이 없을뿐이라는게 다행..

  6. 口笛 2009.09.2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31부대의 인체실험을 일본이 자행했지만 일본의 패전후 자료들은 미국이 쌔벼가서 오늘날 의료강국이 된거라고 들었습니다. 제약회사 신입시절 연수갔을때...

    인간에게 못쓸짓들을 한 자료가 훗날 인간들의 건강을 위해 쓰인다는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말입니다.

    • rumic71 2009.09.26 2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보다 독일쪽에서 강탈해간 게 더 많을 듯 싶군요.

    • Eraser 2009.09.26 2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국이 의료강국의 기초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는게 아마 위의 이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전압 2009.09.27 14: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저는 저 자료들이 의학의 도대체 어떤 부분에 쓰일 수 있는지는 통 감이 안 옵니다만.

    • 45acp 2009.09.28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전압 / 머,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731부대 관련서적을 보면 ,전후 일본에 거의 신의 손이라 불리던 외과의가 있었는데(일본녹십자 쪽인지 동경대 의대부속병원에서 외과부장을 했는지 잘 기억안남)그 기술이 731에서 마루타들 인수분해하며 다져진 실력이었다는 후일담도 있지요.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책도 사실 센세이셔널리즘이 좀 심한 편이긴 하지만....

  7. organizer™ 2009.09.27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자료를 제공해주신 731부대에 감사(?)드린다.

    인정. 대일본 제국의 음덕(?)은 만세에 이어진다는 것이 증명.

  8. 빛나리 2009.09.27 14: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늘 추석용 사과와 배를 먹으면서 대일본제국의 기술력에 다시금 감동을 받았습니다.

  9. 바른손 2009.09.28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아이러니하군요.....

  10. 瑞菜 2009.09.28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외로 사람의 정상 체온이 36.5로란 것도 731부대에서 알아냈다더군요.
    독일도 유태인 상대로 이것 저것 상정할 수 있는 여러 실험을 헸다 합니다.
    이 독일 자료들은 주로 소련쪽에 많이 갔다던데.

  11. 2009.10.06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2. Felix 2014.09.22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자료는 어떻게 구할 수 있나요?
    그리고 저 자료원본이 지금 있으시다면 주실...수있을까요?
    가능하다면 941zxc@naver.com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근.현.대.사 2009.09.13 19:20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과 관련하여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기술을 보면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으로 요약되어 있다. 국내에 간행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설명들도 이와 대동소이한데, 만약 이에 대한 이의나 반론을 거론한다면 이놈의 나라에서는 졸지에 매국노나 친일파 취급받기 십상이다.

수탈, 수탈하는데 대체 뭘 그리 수탈해갔고, 뭘 그리 착취해갔는지 학계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데이터나 실증자료를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식민지 조선에 설립된 제국의 국가기관들이 헤비타트 같은 봉사단체가 아닌 이상, 자국의 이익을 어느정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도떼처럼 몰려와서 세간살이를 다 들어내고 강탈해간 것처럼 피해상황을 쓸데없이 과장하고, 억지로 말을 만들고, 견강부회하는 식의 설명들이 학생들에게 막연한 적개심 외에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

1. 동척의 설립목적이 토지수탈과 소작료 착취에 있었나?

척식이란 말 그대로 외지에 버려진 땅을 개척하여 그곳에 자국인을 이주, 정착시킨다는 얘기다. 1900년 초 일본정부는 넘쳐나는 농업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해외의 농지를 개척하여 이들을 이주시키면 어떨까 하고 잔대가리를 굴린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척식회사다. 토착민의 반발을 우려하여 선량근면하고 농사경험이 풍부하며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만 뽑아서 이주시키되, 일본의 우수한(?) 선진농법을 전수하여 주면 상호 win-win이 아니겠느냐 하고 시작한 것이다.

2. 과연 토지수탈인가?

수탈이란, 말 그대로 타인의 재화를 강탈해갔다는 말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인용예를 보자.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게 수탈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1만 7714정보의 농지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배당료를 지불했으며, 출자예정지에 대해서는 소작료의 80%를 주고 유상으로 임차했다. 왜 100%가 아니냐, 착취아니냐며 따지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토지신탁이라는 것도 임대수익의 100%를 건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작지의 체납비율이라든가, 개간사업에 대한 투자비 회수, 관리비용 등을 감안했을 때 80%의 유상보상을 꼭 수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걔네들도 땅파서 장사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두번째, 일제가 1913년까지 확보한 4만 7148정보를 거저 빼앗아 간 것도 아닐텐데 이걸 강탈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중 논(畓) 3만 554정보와 밭(田) 12,563 정보는 실거래가를 감안하여 전부 유상보상하였다. 논은 1정보당 291원을 지급했고, 밭은 1정보당 129원을 지불했던 것인데, 일본의 농지거래가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후하게 쳐준 것이다.

그나마, 전국 각지의 불량배들과 모리배들이 개입해 토지매매를 방해하고, 투기꾼들이 극성을 부려 지가(地價)가 앙등하자 결국은 매수작업은 자금고갈로 중단되고 만다. 수탈이 목적이었다면 땅문서 갈아치우고 말뚝이나 박지 이런 식으로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었다고 하는데, 이 양자는 상호간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거꾸로 산림지를 매수해 경작지로 바꾼다음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불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국유지 불하는 그 특별법에 의해 동척이나 일본인 지주들이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조선인을 포함 순수하게 자작을 원하는 소작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산림이나 황무지, 임야 소유도 개간을 위한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하다.

3. 소작료를 착취했나?

또한 네이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백과사전 저술에는 학자들이 참여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엉터리 기술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첫째로 강제로 빼앗은 토지가 아니다. 둘째로 소작인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조선 후기와 비해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일본 본토의 사정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유독 일제시대의 조선 소작인인들에게만은 문제가 되는 것인가?

정약용은 후기 조선시대의 소작료 징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일제시대의 소작료 논쟁과 비교하여 참고할만 하다.

"원래 토지에 대한 주인은 국왕과 경작농민의 二主가 있을 뿐인데 부유한 자가 토지를 겸병하여 "租" 地代를 사사로이 수취하게 되니 토지에 三主가 있게 되고, 농민은 국세 이외에 私租의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관청이 징수하는 地稅는 법제상 총생산량의 약 20분의 1에 지나지 않은 가벼운 것이나 소작제도가 형성된 토지에서는 지주의 수취지대 즉, 私門之租는 50%이며 민곤국빈(民困國貧)의 모든 원인이 이 가혹한 소작지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공물과 각종 부담에 있어서도 잡다한 명칭의 징렴(徵歛)이 행하여져서 결국 그것이 생산량의 10분의 5에 달하고 있으니, 사적지주가 50%의 지대를 징수하고 관청도 50%를 징수하면 소작농(佃夫)는 무엇을 가지고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까"
 

두번째, 영세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소작료를 현금이나 현물로 내지 못하고, 연체한 농민에게는 일종의 리볼빙을 실시하게되었고, 당시 금융권의 이율이 1년에 12% 정도였는데, 동척의 이자율은 조선은행이나 일본 내지 금융기관의 이자율에 비해 오히려 저렴한 편에 속하였다.

4. 그래서 악마의 화신인 동척을 일반 조선농민들은 어떻게 대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고 되어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동척의 설립초기 5년간 자금대부 현황을 보면, 1911년 46.1%, 1912년 47.9%, 1913년 64.4%, 1914년 59.6%, 1915년 57.4%를 조선사람들이 사용했다. 결코 적지않은 사람들이 동척의 자금을 사용하여 농지구입이나 운영비용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5. 일제는 동척의 설립을 한국정부에 강요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 강요하고..라는 표현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다. 오히려 한국정부가 황무지개간 사업에 적극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황무지개발 사업은 대한제국 탁지부에 조세징수권을 빼앗긴 궁내부가 일본공사와 결탁하여 황무지개간사업을 협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당초 협의안은 이렇다. 황무지의 개간사업은 한일합자 척식회사에 위임하되 개간사업시에 기술자, 감독원을 제외한 소요인력의 9/10를 한국인으로 충당하고, 개척된 토지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경작을 희망하면 일정한 조건하에 불하 또는 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체 뭐가 강요란 말인가?

6. 동척은 성공하였나.

실패하였다. 저렴한 토지분양에 미혹되 이주한 일본 내지인들은 쌀 생산량 증대로 인해 쌀값은 급락한 반면에 치솟는 지대와 소작료와 각종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람이 나날이 급증하였다. 1927년 동척은 이주사업을 완전히 접고, 이주사업은 만주와 대만으로 무대를 갈아타게 된다. 이후 동척은 평범한 금융기관으로서의 위상이나마 갖추지만, 식산은행과 조선은행의 규모에 비하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동척의 사업으로 말미암아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작쟁의가 격렬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막연한 얘기일 뿐이다.

Posted by 眞明行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백범 2009.09.13 1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이면 '전두환 장군님을 찬양하신' 똥녕이으 아부지가 다니시던 회사 아닙네까? ㅋㅋㅋ

  2. 피그말리온 2009.09.13 1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공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름 해외투자의 형식을 취한건데 실패한거라고 봐야겠네요.

  3. arche 2009.09.13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저런 기록들을 보면 조선후기사회가 워낙 엉망인지라 오히려 일제시대의 법과 행정이 훨씬 낫더군요. (독립운동 하신분 외엔 태평양전쟁 전까지는 괜찮게 산 편이더군요)
    만약 일제시대가 없었으면 남의탓 할게 없어서 심심할 사람들이 많을거 같습니다.

    • 검투사 2009.09.13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비가 "명성황후"가 되고, 이제는 "초콜릿과 와인을 음미할 줄 알았던,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왕비마마"로 기억되게 생긴 판인데요... -ㅅ-; "이 아이는 내 누이동생이오. 사는 게 어려워 궁녀로 입궐한 아이를 왜 이리 괴롭히시오?!"라는 항의에 "아~ 그렇군요. 지송~" 했던 군사들에게 누군가가 타임머신 타고 가서 진실을 알려줘야 하는...응?

    • 인민해방군 2009.09.14 2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법학을 전공하며 법학사를 보다 보면 지금의 법률체계는 일제시대에 완성된것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말기의 법체계는 완전히 기득권층 몇몇만을 위한 법이었을 뿐이죠.
      현대적인 법체계는 일제시대에 온겁니다.

      왜놈들이 침략한건 맞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왜놈들이 왜 착하게 보일까 이럴때에?
      그것은 이들이 식민지 경영이라는것을 영국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죠.
      지들이 착해서 그런것이 아님.

    • BigTrain 2009.09.14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서 본 것 같은데, 왜정시대엔 승진하면 간단한 다과로 책상에서 승진축하 파티를 열었었는데, 독립하고 나니 고급 요정에서 승진축하 잔치를 열더라."는 식의 회고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근대국가의 시스템이 남아있었던 대한민국과 그 시스템이 모조리 무너져버렸던 북한과의 차이를 본다면야 뭐...

  4. reske 2009.09.13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하긴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제의 식민지 경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죠. 배후 생산기지로 만들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자원을 때려박았지만 결국 고스란히 대한민국 정부에 넘기고 와야 했으니..

    생각해보면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단순한 약탈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산기반 건설에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근대적 제도의 이식, 기술자와 엘리트 양성,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을 보면..

    흠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동척이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토지에 대해서는 배당금을 지불했다고 하셨는데요, 한일합방 이후 배당금을 수취한 주체가 누구죠? 대한제국의 이씨 왕가인가요? 아니면 총독부인가요?

  5. 제3의사나이 2009.09.14 0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한국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지요.
    진실을 말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에 얼마나 '진실'이 있을까 의문입니다.

  6. BigTrain 2009.09.14 2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 일부 실려있더군요.

    사실 이야기하는 내용은 거의 같은 이야기인데,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기존의 수탈론이나 착취론은 뭐랄까, 학술적인 서술방식은 아닌 것 같고 말이죠.

  7. 2009.09.15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곰표간장™ 2009.09.15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수탈과 강탈이 목적이었다면 회사따위는 필요없었겠죠.
    그냥 밀고들어가서 말뚝만 뚝딱뚝딱 박으면 끝이었을테니까요;;

  9. 2009.09.15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 我行行 2009.09.15 1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민민주공화국을 자칭하는 김씨왕조의 현물세가 소출의 50%라는 소문도 있지요.

  11. 여우비 2009.09.15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현상은 어느 쪽으로 바라보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비난하고 증오해야지요.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들 일제의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을 덮을 순 없겠습니다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1055&sc=n
    초끔 무개념인 것 같습니다. 횽님들, 요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해도 좋지만 이건 화해를 넘어선 엎드려서 빌기 같은데?

  12. 海凡申九™ 2009.10.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착취하니냐며(x)

    정정부탁드림미돠

  13. 백범 2009.10.24 1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하면... 아 정동영!!!

  14. 만슈타인 2010.03.08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봐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자료의 근거가 어디신지만 좀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15. 짚신 2011.12.08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다.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보냐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진다.
    일제가 우리나라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진자료와 수탈자료를 보고 글을 쓴다면 또다른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분명 일제가 근대적토지제도의 기반과 근대적법제도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은 맞지만 이 글에 나와있는 것처럼 정당하게 이 모든 과정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이 글쓴이가 당시 우리나라 서민이었다면 일제에 대해 이런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6. 흠냐 2012.12.07 16: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아닌듯.동양척식주식회사까지 변호를 하는건 아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