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11.12.29 08:19
군 위안부의 태동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제1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용 매춘시설에서 위안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설은 1932년 군에서 직영한 상해 해군위안소를 위안부의 기원으로 본다. 현재의 통설이다. 제3설은 "모집"에 의해 민간인 위안부가 조달되기 시작한 중일전쟁기 전후를 그 시작으로 본다.

세계 어딜가도 군인이 있는 곳은 매춘의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軍事機密)明治三十七八戰役統計』에 따르면 1905년 9월 현재 관동주에 거류 중인 일본인 2명 중 1명이 매춘부로 조사되고 있다. (관동주 55.4%, 여순 49.2% 금주 78.9%가 매춘부)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병이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막대한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당시에는 전사자가 1,378명인데 비하여 성병으로 전선에서 탈락한 자는 2,012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군당국이 장병의 곧휴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 논저를 살피건대, 군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매춘시설을 통제하거나 감독, 관리하는 묘수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수해준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이 발발하기 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주둔하였던 러시아는 주둔지 안에 허가받은 매춘업소를 설치하였는데 가옥의 무상대여는 물론 보초병을 세우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장병들이 매춘업소를 통과하려면 우선 소속 부대에서 군표를 구매하여 이것을 보초병에게 제시하고 들어갔다. 매춘부들은 수입한 군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대신 소정의 세금을 러시아 군에 바쳤는데, 이런 시스템은 일본 위안부 운영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춘시설은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국, 프랑스, 일본 주둔지에서도 설치되었고 매춘부의 채용 및 위생관리 등에 있어 상호협조하기로 했던 바, 이때 허용된 매춘부의 최저 연령은 13세라지? ㅋ 도동놈의 새끼들. 따라쟁이 일본은 이때 꼽사리 꼈다가 러시아의 선진기법에 흠뻑 감동을 받고, 대동아 전쟁 수행시기에 중국과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결 :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일본은 상해에 해군위안소를 처음으로 시범설치하였는데, 1936년 말 상해영사관의「在留邦人의 特種婦女 狀況 및 단속」이라는 문서를 보면 해군위안소에 종사하는 전체 작부 131명 중 조선인이 29명이라 되어 있으니, 소위 강제연행으로 표방되는 중일전쟁기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대좌부 출신의 위안부는 일본군 전용 섹스파트너로 종사하였지만, 오늘날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바람직 할 것 같다.

1933년 4월 관동군 혼성제14여단에서 작성한「衛生業務旬報」에 따르면 평천(平泉)에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娼妓) 38명이 들어와서 개업했으므로 16일 이들의 검미(檢黴)는 앞으로 매주 1회 실시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중일전쟁기 이전 일본군 위안소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창기(娼妓)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도의 흔한 위안부 인식처럼 조선의 순결한 처녀를 인간사냥하듯 납치하여 군용트럭에 싣고 온 사람들일까? 물론 자의가 아닌 사기와 강요, 또는 인신매매에 의해 부득이 위안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가 군과 결탁한 업자의 손에 트레이드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사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 소수였다, 다수였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같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징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증언자의 사례를 취합해 통계를 산출하는 것은 표본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신뢰성이라곤 1g도 없어보인다. 그런 어설픈 논증으로 일본 원숭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1940년 5월 삼천리에는 「武漢의 朝鮮 동포」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무한(武漢) 삼진(三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는 내지인 약 육천 명, 반도인 약 이천 명이다. 그 생활 상태는 대개 부유하며 또한 일지사변(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각색각종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그외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전지(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위안부라 하면 흔히 포주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동과 생활이 제약된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군 육군대장의 1년치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안부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없다. 이게 단순히 만주의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역시 같은 잡지 삼천리(1941년 제13권)「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씨와 상해의 조선인 제문제를 語함」이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기자 : 남경에는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남경에는 1,000명의 거류동포(居留同胞)가 있습니다.

기자 : 남경에 있는 1,000여명의 조선 동포는 대체로 어떠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위안소,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상해의 위안소는 유곽업과 동종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류동포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나 유괴된 자가 아닌 여권을 소지하고 영사관에 정식신고된 조선 국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나의 의심은 계속된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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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민해방군 2011.12.29 0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말기 경성부 관내 등록된 ♫♫♫만 3만명... 이들중에서만 뽑아도 위안부 숫자는 맞을텐데...

    • MAUS.K 2011.12.29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일본애들이 업소女는 싫다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인민해방군 2011.12.29 0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차피 ♫♪♫들하고 @@ 하는건디?
      왜 갑자기 <민간인>하고 떡치는 스팸광고가...!?

    • MAUS.K 2011.12.29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조선내 업소女들의 상당수가 성병 위험군이라서요. 그래서 내외를 막론하고 민간인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2. Minowski 2011.12.29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저 시대 역사는 파면팔수록 흐드드 해지는 듯...

  3. 강희대제 2011.12.29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장이면 4성장군인가요? 근데 그 1년치 연봉과 맞먹어요?

    • MAUS.K 2011.12.30 1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화15년 고등관 연봉테이블을 참조해보니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연봉 9,600엔
      육군대장은 육군급여령에 의거 연봉 6,600엔

      따라서 저 위의 삼천리호 기사가 사실이고
      화폐가치가 일본과 같다는 전제하에
      연봉순 위안부 >>> 총리대신 > 육군대장

  4. Tretyakov 2011.12.30 1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객관적인 증거들을 뒤져보니, 갈수록 점입가경이로군요...

    덧 : 하지만 1940년에 중국에서 50-60원의 수입을 올렸다는 건... 중국돈으로 올린 게 아닐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에 따르면 쇼와시대 말-종전 전에 1엔의 가치가
    현재 돈으로 2000엔이라는 말이 있는데,(그래서 1엔 문고라는 게 잘 팔렸다고 합니다.)
    지금 수입으로 계산해도 저 정도 화대면... 도대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이어야 가능합니까...

    아무리 보아도 위안부 개인 하나가 육군대장이나 총리대신보다 잘 번다고 상식적으로 말하기 힘들 뿐더러,
    위안부라는 직종이 다른 사람이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중국인 집창촌 같은 걸 생각해 본다면....)
    아마 왕정위 정부가 발행한 화폐나, 일본 군의 군표로 50-60원이 아니었을까요.

    • MAUS.K 2011.12.30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죠. 그런데 문옥주 할머니가 1943년 3월부터 2년간 약 2만6천엔을 저금했었다는 사실이 소송 중에 밝혀진 것을 상기해보면 결코 중국 돈은 아니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당시에 일반사병은 1원 50전, 하사관은 3원 장교는 5원, 긴밤은 20원 하는 식이었는데, 하루 10~20여명 상대했다고 했다고 보면 전혀 불가능한 수입은 아니었죠. 군표라고 해도 현금과 다를 건 없으니까요.

    • Tretyakov 2011.12.30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혹시 삼천리지 원문을 볼 수 있는 곳을 아시나요? 원문이 일본어이고 円으로 나왔다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나 중국에서 쓰는 元, 圓으로 나왔다면 논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덧붙여 문옥주 할머니 증언 출처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주 거칠게 계산해서 하루 평균 3원X15명=45원,
      45원X30일=1350원, 1350원X12달=16200원인데...
      (수가 사병>하사>장교로 루트식으로 수렴하고,
      긴밤이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문제가 되는 건 여기서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했느냐,
      혹은 군표냐 현금이냐. 군표였다면 할인해서 엔으로 바꿨느냐.
      (군표의 경우는 아시다시피 전시에 국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시중의 화폐로 바꾸기가 힘들지요.)
      중국돈으로 받았다면 중국돈을 암환전업자에게서 바꾸었느냐...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 MAUS.K 2011.12.31 0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삼천리 원문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검색이 가능하십니다. 국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원"으로 표기가 되었습니다. 문옥주 할머니의 경우 네이버 뉴스아카이브에서 검색 가능하시고요. 그리고 소화15년 일본 육군봉급령에 의한 관등별 봉급표를 보면 한자로 圓이라 단위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 대한건아 2013.02.23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ㅡ만약 돈을 글케 많이 받앗다면 과연 광복이후 어떻게살앗을까?머리가없냐? 억울한 사람들 더 아푸게하지말지?

    • 감사 2014.05.13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제시대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가 죽어라 고통만 당한 불쌍한 분들... 어쩌구 하는 인식이 있어서 이런 수입이 믿기지 않는 듯 합니다.

      요즘 업소녀들 수입이 얼마인 줄 짐작해 보시면 충분히 공감이 가실 듯 하군요. 지금도 연봉 순으로 하면 당연히 업소녀 >>> 대통령 >>> 육군대장 순입니다.

  5. 쪽바리 개새끼 2012.12.08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 나라 일본으로 돌아가서 마음껏 글 쓰시오.


근.현.대.사 2011.12.27 00:46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가 1902년 7월부터 2개월간 경주, 개성, 서울 및 그 주변을 조사하여 1904년에 작성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따르면 당시 불국사는 대웅전, 다보탑, 석가탑, 자하문, 극락전, 범영루와 무설전이 남아 있었고, 자하문과 범영루 사이에는 회랑도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의 대 석축이나 청운교, 백운교 등은 모두 허물어져 있어 그 보존상태가 심각하였다. 수리전의 광경을 보면 '석단의 동쪽 가장자리는 파묻혀서 경사면을 이루었고, 서측의 석루 같은 것은 완전히 흙속에 묻혀서 석단다움이 사라지고 돌계단은 비틀어졌으며, 돌난간은 쓰러져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05년경 자하문에 연결된 회랑마저 붕괴되고 1910년경에는 무설전이 붕괴되면서 총독부는 불국사 정비를 실시한다. 불국사의 정비는 1919년부터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수리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1925년까지 불국사 주지에게 지급되었다. 1934년과 1935년에도 추가 보수공사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수학여행때마다 우루루 몰려가서 사진을 찍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랍시고 자랑스러워 하는 불국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당시 불국사 주지가 불교개혁이니 내선교류니 심전(心田)개발이니 일제정책에 적극협력한 댓가로 얻어낸 산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1. 일제에 합방된 직후 불국사 전경 (1914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일제의 보수공사 이후 불국사 전경(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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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날과 같은 불국사의 장엄한 위용은 일제시대에 그 원형이 마련된 것으로, 소위 잘나신 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전통이 무너지고 왜색풍이 가미되었다든지, 실측도의 원형을 무시한 졸속복원이었다든지 말들이 많다. 자기 나라 문화재를 저렇게 폐허로 방치하고 남의 손에 의해 보수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껴야 순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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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빠 2011.12.27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활발한 포스팅 감사합니다.

    불국사 하니 패션진보들의 천사병이 떠오르네요.. 광화문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밥먹여줘라, 4대강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난방해줘라, 스키점프대회 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목욕시켜줘라... 정작 저런 문화유산이나 상징적 건축물로 인해 생겨나는 외부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이죠. 그렇게 따지면 불국사야 말로 민중을 수탈하고 백성들을 굶겨죽이면서 만든 전시행정일텐데 말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그렇게 떠받치는 것들이 일제의 잔재요 (그분들 말에 의하면),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것들이 한민족의 거지근성이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백범 2012.01.05 2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광화문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밥먹여줘라, 4대강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난방해줘라, 스키점프대회 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목욕시켜줘라..."

      참 핑계들은 좋지요.

      그덕에 서울시내에 상류층 학생들은 일부러 집에서 따로 영양간식이란걸 싸갖고 다니거나 배달하는 것(다 학교로 반입 가능합니다.)이며, 어느정도 되는 애들은 급식 안먹고 매점 달려가거나 월담하는 것을 저들은 모르나 봅니다.

      그리고 중학생, 고교생만 되면 그 유명한 노스페이스의 질로 빈부를 가르고 있거늘...

      현실감각없이 망상과 몽상에 빠진 먹물들이 사회를 잘못된 곳으로 오도하고 있지요. 이건 뭐 국가와 국민만 오도하는게 아니라 헛돈까지 낭비하고 앉아있으니...

    • 진빠 2012.01.28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초등학교를 전교생 100명 남칫 안되는 어촌에서 2년정도 다닌 적 있었는데, 여기 학교 급식이 말그대로 무료급식이었습니다.

      반찬은 5일에 2번꼴로 오징어국에(어촌은 일년내내 오징어를 말리죠 ㅡㅡ) 3번꼴로 베트남쌀과 찹쌀을 섞은 김주먹밥이 나왔습니다. 밥을 나기면 식판을 들고 벌을 서야 했기 때문에, 급식시간 5분 전에는 맨날 "하느님 오징어국이 나오지 않게 해주세요"하면서 '성부성자'를 하느라 가슴팍에 十자를 그리곤했습니다. 도시에서 전학온 어떤 애는 일부러 바닥에 국물을 쏟아 버리기도 햇는데, 지금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네요 ㅋㅋㅋㅋㅋㅋ

  2. 강희대제 2011.12.28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3. 드가모프 2011.12.29 0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때마다 느끼지만 좋은 글이 참 많습니다. 주인장 형님의 블로그를 알게 된지 이제 1년이 좀 넘었는데 방명록이 따로없으니 여기에 감사인사를 남기고 갑니다. 연말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올 새해에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MAUS.K 2011.12.29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졸필을 읽어주시고 격려주시는데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드가모프님도 새해 만사형통하시기를

  4. 백범 2012.01.0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뭐... 불국사 복원도 일본놈들이 관광객들 끌어모으기 위해서 정비한 것이며, 조선인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을 것이다 (카더라) 소리가 나올테죠 뭐... 보나마나 뻔할듯.

  5. ㅋㅋㅋ 2012.01.07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읽었습니다.

    추신 : 강희대제도 여기왔네?ㅋㅋ

  6. 미1쳤네 친일파 2012.03.04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시대떄 불국사 관리해줬다고 미1쳤네 가만히 있던 석굴암은 왜 건드는데?
    습기 잘 안차던 석굴암 괜히 건들였다가 시멘트로 떔방해서 습기 차는게 관리 잘해준거냐?

    • ㅎㅎ 2012.03.04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이 화상아. 그럼 그대로 굴이 붕괴되도록 냅두냐?

      시멘트 외에 자연석에도 빗물이 계속 때리거나 침투하면 균열가는건 아냐?

    • 병신새끼 요깅네? 2012.04.19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쿠ㅋㅋㅋㅋ 그러시다면 그냥 불국사 없애버리지?ㅋㅋㅋ

    • 2012.07.04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국사에 적용된 복원방식은 당시로선 최선의 복원방식이었다. 70년대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했을것 같은가? 콘크리트 복원의 한계가 지적된건 최근의 와서다. 그리고 탓할려면 조선왕조를 탓해라. 탈레반들마냥 자기네 유적하나 관리 못해놓고 이제와서 난리신가?

  7. 牙辛正烈 2012.07.15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국사는 그 크기가 원래는 어마어마한 거대한 크기인데.. 이씨조선 시대는 GDP가 500년 동안 0%인데 수리가 했겠나. 5~10%의 인간들만 잘~ 처먹고 잘~ 사는 시대인데 그리고 여성은 완전 노예수준으로 키리까이 뎃쁘리고,,,, 무위문약의 이씨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단군이래 최악의 시대다.

    그나마 일한병합이라도 해서 일한병합 시대 때문에 일반 국민이 36년 동안 잘먹고 학교다니고
    근대화가 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

    병합 36년 말기엔 전쟁 때문에 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많이 힘든 시기였는데.
    한국은 또 이 시기를 일본이 조선을 강정착취 했다며 비방한다.


근.현.대.사 2010.09.02 16:07
일본의 토지 40% 약탈론에 대하여 짧게.(수정부분 있음)

트랙백 원문의 댓글에서도 밝혔지만, 슈타인호프님의 포스팅은 기본적으로 오독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에 의하면 농지가 아닌 임야를 포함할 경우 일제가 50% 이상 소유한 게 맞다는 것인데, 이것이 수탈론과 결부되면서 그쪽으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께서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예전에 쓰신 링크 포스팅을 보면 토지조사사업이 아닌 임야조사사업까지 포함할 경우, 수탈론의 근거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의 해명과는 상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신돼지 선생이나 배재수의 억지춘향식의 수탈론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모양새와 다름 아닙니다.

실제로 카인백작씨는 슈타인호프님의 이 포스팅을 이용하여 무려 농지수탈의 근거로 써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난독자들에게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요? 아침에 나츠메님이 이 부분에 대해 개론적으로 반론 댓글을 다셨습니다만, 보론 형식으로 언급해보겠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임야조사사업이 완결된 당시 국유지에 임야가 편입됨으로써 그 규모가 엄청나게 폭증합니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과는 달리 임야조사사업은 연고가 있는 것으로 신고된 임야는 구) 산림법 제19조에 의한 신고 여부를 불문하고 民有로 간주하여 조사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는 임야조사보고서 39쪽에도 기술된 내용으로도 뒷받침이 가능합니다.

『연고자 중 ① 구)산림법의 규정에 의한 지적의 신고를 태만히 하였기 때문에 국유로 귀속된 것과, ② 구)산림법 시행 전에 적법하게 점유하고 계속하여 점유한 것 중 상당하는 禁養의 실적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술한 것과 같이 民有를 인정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렇다면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국유림으로 편입시켰는지에 대해 의문이 남습니다. 첫째는 이 토지들의 상당수가 소유권 내지는 연고권에 분쟁의 소지가 있어 이에 대한 조정이 완결될 때까지 양도를 보류한 것입니다. 둘째는 조림사업이라는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고권을 법인화하는 대신 산림의 관리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 대여의 형식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임야조사사업에서 이미 民有로 사정하고 있고, 법에 의해 총독부는 이들의 임야를 제3자에게 처분할 수 없다고 규정된 이상, 비록 형식적인 국유림의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상의 소유권은 민간에게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총독부 통계를 보실 때는 이 점에 유의하셔야 할듯 합니다.

연고권이 있는 임야를 국가가 아닌 개인이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토지를 제외하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림은 전체 임야의 38% 남짓 됩니다. 여기에서 구한말부터 국가의 소유로 있던 면적을 제하면, 총독부가 신규 취득한 임야는 훨씬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돼지 선생의 주장처럼 일제가 50%넘는 임야를 강탈했다는 논거로 이 통계가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을 볼 때, 토지수탈과 임야수탈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한꺼번에 뭉뚱그려 설명하고 있는 표현들이 보입니다. 종전의 교과서들이 그랬고(40%의 농지수탈론은 삭제되었습니다만..), 어린 학생들이 보는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다음과 같이 버젓이 그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 또는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 %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아시다시피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된 1918년 12월말 현재 국유지의 면적은 전답과 임야를 합쳐 272,076정보로 전체 토지의 5.5%에 불과합니다. 이런 오류들을 아무도 지적하지도 않고, 또 고치려는 사람이나 의지도 없습니다. 이점은 슈타인호프님께서도 동의하고 계시니 재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일제가 임야조사사업을 개시하기 전 조선의 임야관리 상태는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토지대장이나 임야대장 같은 것들이 있을 턱이 없어서 나무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거나 표식을 남기는 전근대적인 방식(소위 입목에 대한 명인의 방법)으로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조선후기 때부터 산림의 소유권과 관련된 분쟁이 폭증하였습니다.

일제의 임야조사사업은 근대적인 지적대장의 도입과 체계적인 임야관리행정, 조림사업 등을 위해 시행된 것이지, 임야수탈을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민유지를 불하하면서 일정 비율이상의 식림의무를 조건으로 양여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임야를 보유한다는 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큰 돈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에게 국유지를 불하할 때는 매우 염가에 넘겼고, 사실 임야 대부로 인한 조세 수입도 보잘 것 없이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슈타인호프님의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수 증대를 위해 불요존림을 개인에게 양도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얘깁니다. 또한 불요존림은 벌거숭이 산이라 돈이 안되니까 민간에 불하했다는 지적도 사실과 다릅니다. 평균입목도가 3/10에 미달하는 불요존림은 양여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요존국유림을 원 연고자에게 반환했다면 명목은 좋게 들리지만, 그 실상을 보면 그렇게 좋아하거나 감사할 것도 없었다는 얘기는 하나마나한 불필요한 사족입니다. 임야조사사업이 국토 전체의 조림사업, 등기나 임야대장 같은 근대적 소유권 제도 도입에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일제에 감사? 일제의 은덕? 이런 지적은 논점을 회피하기 위한 시도로 밖에 안보입니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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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타인호프 2010.09.02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세한 보충의 말씀 잘 보았습니다. 개괄적인 자료만 본 참이라 삼림법의 해당 조문까지 다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였는데, 애초에 그런 사항까지 다 규정되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결국 서류상의 소유자와 실제적인 재산권자 중 어느 쪽을 인정하느냐의 시점 차이가 될 것 같습니다. 간도의 실효지배 여부 문제를 논할 때 생각이 나네요.

    세수 문제를 위해 불요존국유림을 불하했다는 견해는 제 독자적인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링크된 산리조합 연재기사에서 본 것이고, 제시된 사례로 보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 전체 액수가 총독부 전체 재정 규모에 비추어 미미할 수는 있겠으나 실제 말단 차원에서의 유용 사례가 있다면 그걸 노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 딴소리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았겼다는 사실이 사라질 수 없는 이상 수탈론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일본인들이 왔고, 다스려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통치권을 가져간 게 명확한 이상 이 땅에서 실시한 일본인들의 모든 행위가 우리 걸 뺐어가는 행동으로 비치는 건 당연하지 싶네요. 물론 그런 시각만 가지고 역사를 보면 곤란하다는 거야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고...;;

    하여튼 상세한 보충의 말씀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끝부분의 벌거숭이 산이라 돈이 안되니까 민간에 불하했다...고 하신 부분의 제 원래 의도는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뺐었다가 돈 안 되는 숲이라 돌려준 것"이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돈 되는 숲만 골라서 일제가 뺐어갔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거였습니다. 제 뜻을 보다 더 잘 전달하는 연습을 아직 더 해야겠네요.

    • 無名氏 2010.09.02 1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역시 포스팅은 집에서 해야겠군요.
      다시 읽어보니 자료도 없고 도표도 없고 내용이 너무 부실합니다.

      반론의 취지는 다른데 있지 않고
      본질을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는 취지이오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별 내용도 없는데 공연히 부족한 시간을 뺏지나 않았는지 염려되는군요.

    • 나츠메 2010.09.02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슈타인/

      '말단 차원에서 사례가 있으니 총독부가 그걸 노린 것'이다?

      헐..... 개념이 없군. 말할 때 마다 어떻게 왜곡이 늘어나는지 이해할 수 가 없군.
      '현상을 통해 목적을 분석'할 때의 문제점, 침소봉대의 문제점은 제쳐두고라도,
      관련 법령집도, 논문도, 1차 사료도 제대로 안 읽고 총독부의 목적이 세수증가라고 외치는 그 자신만만함을 어떻게 봐야 할 지 참으로 안습임.

      남의 블로그에서 글을 쌀 때는 좀 더 알아보고 싸거라 이 잉간아..
      그냥 니가 본 '책'이나 '기사'에는 없다고 자랑하지 말고. ㅋ

    • 슈타인호프 2010.09.02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로서는 올려주신 내용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모르는 부분에 대해 가르침 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으니 그 점은 염려 마시고, 편안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 :)

  2. 주코프 2010.09.02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시기 토지 및 임야 관련 정책에 대해 정확한 논지로 소개해주셔서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추천드립니다..^^

  3. 無碍子 2010.09.02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냉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면 조선국(혹은 조선왕, 대한제국황제폐하)소유 부동산이 일본국(혹은 조선총독부)으로 소유권이전등기 되는 과정입니다.

  4. 갈천 2010.09.03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았습니다.
    역시 기본개념은 일본정부가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특별히 수탈 어쩌구 할 필요가 없다고 봐야겠네요.

  5. 2010.09.04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2010.09.04 0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공손연 2010.09.05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슈타인호프님의

    "약간 딴소리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았겼다는 사실이 사라질 수 없는 이상 수탈론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진짜 딴소리를 넘어서 뻘소리같습니다.그냥 자기가 말하는 개념이 맞는건지 틀린건지 구분좀하세요.자료를 건드리기전에 사실을 그대로 보겠다는 의지부터 가지는 훈련도 하셔야 할듯

  8. 2010.09.07 0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10.09.08 1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