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09.09.13 19:20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과 관련하여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기술을 보면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으로 요약되어 있다. 국내에 간행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설명들도 이와 대동소이한데, 만약 이에 대한 이의나 반론을 거론한다면 이놈의 나라에서는 졸지에 매국노나 친일파 취급받기 십상이다.

수탈, 수탈하는데 대체 뭘 그리 수탈해갔고, 뭘 그리 착취해갔는지 학계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데이터나 실증자료를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식민지 조선에 설립된 제국의 국가기관들이 헤비타트 같은 봉사단체가 아닌 이상, 자국의 이익을 어느정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도떼처럼 몰려와서 세간살이를 다 들어내고 강탈해간 것처럼 피해상황을 쓸데없이 과장하고, 억지로 말을 만들고, 견강부회하는 식의 설명들이 학생들에게 막연한 적개심 외에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

1. 동척의 설립목적이 토지수탈과 소작료 착취에 있었나?

척식이란 말 그대로 외지에 버려진 땅을 개척하여 그곳에 자국인을 이주, 정착시킨다는 얘기다. 1900년 초 일본정부는 넘쳐나는 농업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해외의 농지를 개척하여 이들을 이주시키면 어떨까 하고 잔대가리를 굴린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척식회사다. 토착민의 반발을 우려하여 선량근면하고 농사경험이 풍부하며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만 뽑아서 이주시키되, 일본의 우수한(?) 선진농법을 전수하여 주면 상호 win-win이 아니겠느냐 하고 시작한 것이다.

2. 과연 토지수탈인가?

수탈이란, 말 그대로 타인의 재화를 강탈해갔다는 말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인용예를 보자.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게 수탈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1만 7714정보의 농지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배당료를 지불했으며, 출자예정지에 대해서는 소작료의 80%를 주고 유상으로 임차했다. 왜 100%가 아니냐, 착취아니냐며 따지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토지신탁이라는 것도 임대수익의 100%를 건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작지의 체납비율이라든가, 개간사업에 대한 투자비 회수, 관리비용 등을 감안했을 때 80%의 유상보상을 꼭 수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걔네들도 땅파서 장사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두번째, 일제가 1913년까지 확보한 4만 7148정보를 거저 빼앗아 간 것도 아닐텐데 이걸 강탈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중 논(畓) 3만 554정보와 밭(田) 12,563 정보는 실거래가를 감안하여 전부 유상보상하였다. 논은 1정보당 291원을 지급했고, 밭은 1정보당 129원을 지불했던 것인데, 일본의 농지거래가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후하게 쳐준 것이다.

그나마, 전국 각지의 불량배들과 모리배들이 개입해 토지매매를 방해하고, 투기꾼들이 극성을 부려 지가(地價)가 앙등하자 결국은 매수작업은 자금고갈로 중단되고 만다. 수탈이 목적이었다면 땅문서 갈아치우고 말뚝이나 박지 이런 식으로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었다고 하는데, 이 양자는 상호간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거꾸로 산림지를 매수해 경작지로 바꾼다음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불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국유지 불하는 그 특별법에 의해 동척이나 일본인 지주들이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조선인을 포함 순수하게 자작을 원하는 소작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산림이나 황무지, 임야 소유도 개간을 위한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하다.

3. 소작료를 착취했나?

또한 네이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백과사전 저술에는 학자들이 참여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엉터리 기술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첫째로 강제로 빼앗은 토지가 아니다. 둘째로 소작인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조선 후기와 비해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일본 본토의 사정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유독 일제시대의 조선 소작인인들에게만은 문제가 되는 것인가?

정약용은 후기 조선시대의 소작료 징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일제시대의 소작료 논쟁과 비교하여 참고할만 하다.

"원래 토지에 대한 주인은 국왕과 경작농민의 二主가 있을 뿐인데 부유한 자가 토지를 겸병하여 "租" 地代를 사사로이 수취하게 되니 토지에 三主가 있게 되고, 농민은 국세 이외에 私租의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관청이 징수하는 地稅는 법제상 총생산량의 약 20분의 1에 지나지 않은 가벼운 것이나 소작제도가 형성된 토지에서는 지주의 수취지대 즉, 私門之租는 50%이며 민곤국빈(民困國貧)의 모든 원인이 이 가혹한 소작지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공물과 각종 부담에 있어서도 잡다한 명칭의 징렴(徵歛)이 행하여져서 결국 그것이 생산량의 10분의 5에 달하고 있으니, 사적지주가 50%의 지대를 징수하고 관청도 50%를 징수하면 소작농(佃夫)는 무엇을 가지고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까"
 

두번째, 영세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소작료를 현금이나 현물로 내지 못하고, 연체한 농민에게는 일종의 리볼빙을 실시하게되었고, 당시 금융권의 이율이 1년에 12% 정도였는데, 동척의 이자율은 조선은행이나 일본 내지 금융기관의 이자율에 비해 오히려 저렴한 편에 속하였다.

4. 그래서 악마의 화신인 동척을 일반 조선농민들은 어떻게 대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고 되어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동척의 설립초기 5년간 자금대부 현황을 보면, 1911년 46.1%, 1912년 47.9%, 1913년 64.4%, 1914년 59.6%, 1915년 57.4%를 조선사람들이 사용했다. 결코 적지않은 사람들이 동척의 자금을 사용하여 농지구입이나 운영비용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5. 일제는 동척의 설립을 한국정부에 강요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 강요하고..라는 표현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다. 오히려 한국정부가 황무지개간 사업에 적극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황무지개발 사업은 대한제국 탁지부에 조세징수권을 빼앗긴 궁내부가 일본공사와 결탁하여 황무지개간사업을 협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당초 협의안은 이렇다. 황무지의 개간사업은 한일합자 척식회사에 위임하되 개간사업시에 기술자, 감독원을 제외한 소요인력의 9/10를 한국인으로 충당하고, 개척된 토지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경작을 희망하면 일정한 조건하에 불하 또는 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체 뭐가 강요란 말인가?

6. 동척은 성공하였나.

실패하였다. 저렴한 토지분양에 미혹되 이주한 일본 내지인들은 쌀 생산량 증대로 인해 쌀값은 급락한 반면에 치솟는 지대와 소작료와 각종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람이 나날이 급증하였다. 1927년 동척은 이주사업을 완전히 접고, 이주사업은 만주와 대만으로 무대를 갈아타게 된다. 이후 동척은 평범한 금융기관으로서의 위상이나마 갖추지만, 식산은행과 조선은행의 규모에 비하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동척의 사업으로 말미암아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작쟁의가 격렬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막연한 얘기일 뿐이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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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범 2009.09.13 1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이면 '전두환 장군님을 찬양하신' 똥녕이으 아부지가 다니시던 회사 아닙네까? ㅋㅋㅋ

  2. 피그말리온 2009.09.13 1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공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름 해외투자의 형식을 취한건데 실패한거라고 봐야겠네요.

  3. arche 2009.09.13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저런 기록들을 보면 조선후기사회가 워낙 엉망인지라 오히려 일제시대의 법과 행정이 훨씬 낫더군요. (독립운동 하신분 외엔 태평양전쟁 전까지는 괜찮게 산 편이더군요)
    만약 일제시대가 없었으면 남의탓 할게 없어서 심심할 사람들이 많을거 같습니다.

    • 검투사 2009.09.13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비가 "명성황후"가 되고, 이제는 "초콜릿과 와인을 음미할 줄 알았던,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왕비마마"로 기억되게 생긴 판인데요... -ㅅ-; "이 아이는 내 누이동생이오. 사는 게 어려워 궁녀로 입궐한 아이를 왜 이리 괴롭히시오?!"라는 항의에 "아~ 그렇군요. 지송~" 했던 군사들에게 누군가가 타임머신 타고 가서 진실을 알려줘야 하는...응?

    • 인민해방군 2009.09.14 2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법학을 전공하며 법학사를 보다 보면 지금의 법률체계는 일제시대에 완성된것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말기의 법체계는 완전히 기득권층 몇몇만을 위한 법이었을 뿐이죠.
      현대적인 법체계는 일제시대에 온겁니다.

      왜놈들이 침략한건 맞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왜놈들이 왜 착하게 보일까 이럴때에?
      그것은 이들이 식민지 경영이라는것을 영국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죠.
      지들이 착해서 그런것이 아님.

    • BigTrain 2009.09.14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서 본 것 같은데, 왜정시대엔 승진하면 간단한 다과로 책상에서 승진축하 파티를 열었었는데, 독립하고 나니 고급 요정에서 승진축하 잔치를 열더라."는 식의 회고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근대국가의 시스템이 남아있었던 대한민국과 그 시스템이 모조리 무너져버렸던 북한과의 차이를 본다면야 뭐...

  4. reske 2009.09.13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하긴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제의 식민지 경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죠. 배후 생산기지로 만들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자원을 때려박았지만 결국 고스란히 대한민국 정부에 넘기고 와야 했으니..

    생각해보면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단순한 약탈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산기반 건설에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근대적 제도의 이식, 기술자와 엘리트 양성,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을 보면..

    흠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동척이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토지에 대해서는 배당금을 지불했다고 하셨는데요, 한일합방 이후 배당금을 수취한 주체가 누구죠? 대한제국의 이씨 왕가인가요? 아니면 총독부인가요?

  5. 제3의사나이 2009.09.14 0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한국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지요.
    진실을 말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에 얼마나 '진실'이 있을까 의문입니다.

  6. BigTrain 2009.09.14 2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 일부 실려있더군요.

    사실 이야기하는 내용은 거의 같은 이야기인데,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기존의 수탈론이나 착취론은 뭐랄까, 학술적인 서술방식은 아닌 것 같고 말이죠.

  7. 2009.09.15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곰표간장™ 2009.09.15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수탈과 강탈이 목적이었다면 회사따위는 필요없었겠죠.
    그냥 밀고들어가서 말뚝만 뚝딱뚝딱 박으면 끝이었을테니까요;;

  9. 2009.09.15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 我行行 2009.09.15 1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민민주공화국을 자칭하는 김씨왕조의 현물세가 소출의 50%라는 소문도 있지요.

  11. 여우비 2009.09.15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현상은 어느 쪽으로 바라보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비난하고 증오해야지요.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들 일제의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을 덮을 순 없겠습니다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1055&sc=n
    초끔 무개념인 것 같습니다. 횽님들, 요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해도 좋지만 이건 화해를 넘어선 엎드려서 빌기 같은데?

  12. 海凡申九™ 2009.10.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착취하니냐며(x)

    정정부탁드림미돠

  13. 백범 2009.10.24 1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하면... 아 정동영!!!

  14. 만슈타인 2010.03.08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봐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자료의 근거가 어디신지만 좀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15. 짚신 2011.12.08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다.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보냐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진다.
    일제가 우리나라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진자료와 수탈자료를 보고 글을 쓴다면 또다른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분명 일제가 근대적토지제도의 기반과 근대적법제도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은 맞지만 이 글에 나와있는 것처럼 정당하게 이 모든 과정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이 글쓴이가 당시 우리나라 서민이었다면 일제에 대해 이런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6. 흠냐 2012.12.07 16: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아닌듯.동양척식주식회사까지 변호를 하는건 아니네요.


근.현.대.사 2009.01.17 00:49
일제 말기, 중추원 사상조사위원회에 보고된 쇼와 19년(1944년)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자료에 의하면 수집된 유언비어로서 ①김일성은 영웅이다라는 소문 ②미혼여성은 징용한다는 소문 - 이로 인한 조혼(早婚) 풍조, ③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①은 그런갑다 할만하지만..②번은 좀 의외다. 미혼여성을 징용한다는 소문은 아마도 정신대나 위안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를 유언비어로 중추원에 공식보고 했다는 것은 위안부 징용은 거짓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죽자사자 시위하는 할마시들 무서워 함부로 얘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동 자료에는 ①에 대해서 조금 상술한 얘기들이 있다. 김일성 가짜설을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면 안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필기체로 되어 있어서 대학교수들도 해석하지 못한 내용을 올해 92세인 김병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강의 뜻을 파악했다.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한국어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분이셔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金日成-본명,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 父는 撫松의 의원, 母는 龍山 어쩌구 저쩌구(해석불가) 장덕학교, 길림중학교 다니다가 공산비에 참여. 쇼와 10년(24세)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부하 수백명), 만주 치안확립 후(즉, 숙정공작 이후) 소련에 들어가서 첩자양성소 교관이 됨. 쇼와 11년~12년사이에 국경지대에 자주 출몰하다 혜산사건(보천보전투, 쇼와 12년) 당시 조선으로 침입하여 소요하고 도주함."

이 자료에 의하면, 서대숙이나 이종석이 얘기하는 바, 김일성의 실체설을 확실히 뒷받침 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는데, 혜산사건을 다룬 사상휘보(1939년)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임.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이 가능하니, 굳이 여기서 따로 그 내용을 이미지 파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다만, 동북항일연군에도 김일성이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섣불리 이 자료를 100%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자료가 틀렸다는 것을 반증할 자료가 나오지않는 한,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도 바람직 하지 않은게 사실. 이명영의 연구는 증언 위주의 채록이 한계이기는 하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가치는 있음. But 서대숙이나 이종석의 연구를 뒤집기는 무리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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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지화랑 2009.01.17 0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예전에 장지량 장군 회고록을 보니까 광복 즈음에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사를 나와서 만주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지금 50대쯤 되셨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구절이 기억나는군요.

    • 眞明行 2009.01.1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김일성의 실체야, 남측인사들과 북측인사들의 주장이 상당히 엉켜있어서 말이죠. 그런데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임은의 주장이나, 중국쪽 자료들, 일본측의 공식자료들을 보면 아무리 봐도 김일성=김광서=김경천說에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체역사를 빙자한 판타지물 주제로 써먹기엔 좋지 않을까요? ㄲㄲㄲ?

  2. 야스페르츠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단속의 대상"이 될 정도의 소문이라면 반드시 "유언비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흔히 하는 말처럼, 뭔가 구린게 있으니까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거라는.... 2번 문제와 관련되서는 왠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라기 보다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군요)

    • 眞明行 2009.01.17 0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그런가요? 뭐 우리야 그냥 웃어넘길 수 밖에..

      사실 단속의 대상이란 말은 없고(편의상 제가 집어넣은 말입니다만..) 조선의 사상범이나 불온통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런 얘기가 있더라는 정보를 중추원에 보고하는 자료인 것을 감안하면 함부로 예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리도 '유언비어'로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뭐. -ㅁ-;;

    • 眞明行 2009.01.17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죠? 1944년?

    • 천지화랑 2009.01.17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장 피를 많이 본 임팔작전이 1944년 3~6월이었죠. 그런데 또 '남방전선'이란 단어가 또 동남아쪽만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한다면 이미 1942년 이후로 일본군은 해전에서 계속 수세에 몰렸으니까요.

  3. 2009.01.17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새벽안개 2009.01.17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석의 애매함이 있네요. 유언비어 일수도 있고,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일수도....

    • 眞明行 2009.01.17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김일성 영웅론은 확실히 과장된 정보에 낚였을 확률이 많지요. 반면에 남방전선 전사자수와 관련된 것은 구체적인 범위와 내용을 알수가 없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봅니다. 1944년 말경에 작성된 자료이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건에 대해서는 저 문서의 내용만 가지고는 섣불리 확언하기가 어렵군요.
      추가로 조사해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용상으로는 적어도 강제징용이 중추원 차원에서 그 여부를 알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5. 한단인 2009.01.17 0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일단 유언비어란 의미가 사전적 의미로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 일반에 유포되고 있다는 것과 달리 저기에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퍼지면 총독부가 곤란해질 만한 '소문'을 의미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네요. 언급하신대로 남방전선 껀의 경우는 실제로 전사자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6. 니미츠 2009.01.17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조심스럽게 남겨봅니다. 사실 남방전선 전사자 자체, 아니 태평양전쟁 자체도 초기에 승승장구할때도 그렇게 적지 않다고 알고 있어서요; 임팔이야 화룡점정이지만(대한민국 건국공신 무다구치 렌야), 3은 확실히 곤란해질만한 소문이었던거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연쇄적으로 2도 좀...

  7. organizer 2009.01.17 0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정보'도 다 보고서로 만들어 보고하는 군요..... <--- 기록 문화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인 듯... ;;

    • 眞明行 2009.01.17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애들의 일제시대 사료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어서 매우 놀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8. Joker™ 2009.01.17 1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팔작전이 벌어진던 1944년 경이면 이미 솔로몬-라바울 방면을 포함한 일본군은 붕괴가 결정된 상태였고 기실 임팔작전은 '이거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정말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상태에서 강행한 작전이었죠.

    1942년 중, 후반의 과달카날 전선이 전개되며 이때부터 뉴기니, 동남아 방면에서도 급격히 전력의 소모가 이루어졌으니 1943년부터 이미 슬슬 정보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 히라쿠시 중좌의 대본영 보도부를 다시 꺼내봐야지..............

    • 眞明行 2009.01.17 1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1943년경 일본군 패주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가 무려 유언비어 살포죄로 투옥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9. 슈타인호프 2009.01.17 1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사자 수의 "급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지상전일 겁니다. 윗분들이 말씀하신 임팔 작전 이외에 사이판 함락(44년 6월) 같은 경우 만 단위의 병력이 손실됐죠.

    • 眞明行 2009.01.17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육상전의 경우 그 이전부터 쳐발리기 시작해서요.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죽을 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 reske 2009.01.17 1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안부 강제동원의 경우... 이영훈교수의 경우 저서에서 (군경에서 나서서 집행한)강제동원은 거의 없었으며 취업사기+협박이 주된 동원수단이었다고 하는데.. 글쎄 교과서에 나온 위안부 증언같은걸 보면 그냥 다짜고짜 끌려갔다는 사람도 있었던걸로 기억하거든요.. 어느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상으로 보아 사람사냥이 있었다 하더라도 취업사기가 주된 동원방법이었던 듯 싶더군요.

  11. 예니체리 2009.01.17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징용-조혼이라고만 써져 있는데 그걸 위안부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요?

  12. 미친과학자 2009.01.17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봐도 3번은 루머가 아니지 싶은...ㅡㅡ;;;; 전사에 빠삭하진 않지만 포트 모레스비 이후로 일본군은 남방에서는 계속 밀리기만 했지 싶은데 말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생각해봐도 1942년때의 일이니.....

    • Joker™ 2009.01.17 1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완전히는 아니죠.

      1944년 마리아나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기 전까지, 일본해군은 전략적으로 점차 불리해지는 와중에 '미 해군 창군 이래 최대의 치욕'이라 불리는 사보 해전의 대승을 비롯해 몇 차례의 야간해전과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기는 했습니다. 1943년도까지는 태평양에서 오히려 일본해군의 전력이 더 우위였거든요.

      실제로 도조 히데키 내각은 절대국방권을 성립하면서, 이곳에서는 미 해군을 '정말로'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ㅅ-;;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었죠. 호위항모를 하루에 1척 단위로 뽑은 나라라서;; (먼산)

      덧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수리한 함들+신조함들의 훈련에 바빴습니다. 1944년 이후로 이 전력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게임 끝 'ㅅ' /

    • 미친과학자 2009.01.17 2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참 그게 있었군요.

      ....그런데 그런 전력을 가지고 왜 빌빌댄거지...역시 대함 거포주의에 묶인 인생의 종말인가 ㅡㅡ;

    • 천지화랑 2009.01.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의 그 강력한 전력이라는 건 말하자면 '더 이상 재고 올릴 라인이 없는 창고'였죠. -ㅁ-;; 당장 가용전력 자체는 강력한데 뒷받침해 줄 게 아무것도 없달까요. 예를 들면 비행기든 조종사든 -_-;;

    • 미친과학자 2009.01.18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신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결론 : "닥치고 물량"(뭣)

  13. 2009.01.18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낙 전문분야도 아니고, 뻘 포스팅 같아서 일단 비공개로 돌렸습니다만, 출처라든가 자료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14. 2009.01.18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땅굴 얘기가 나와서, 미국 뉴스그룹의 소스를 조사하던 도중에 이상한 얘기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재미삼아 쓸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내렸습니다. ^^; 전역하셨어도 당시 취급하시던 정보들을 발설하시면 안되겠지요?

      포스팅에 썼던 얘기들은 주간동아에서 이미 오래전에 보도했던 것이고, 원 출처를 찾아보니 pdf로 만들어져있더군요. 딱딱한 전술전략이 아니라 그래픽 위주(예컨대 북한군의 견장이라든가 전술도해 같은 것들이 있어 재밌더군요. 원하신다면 링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5. 2009.01.18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7/nkor.pdf

      링크가 언제 짤릴지 모르니 다운받아서 저장해놓으시는게 좋을 듯합니다.

  16. 2009.01.19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7. 2009.01.19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인.물.평.론 2008.12.11 17:01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매카시즘이라는 용어에 대해 들어본다. 매카시즘의 용례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폭넓게 구사되고 인용되어지는 경우는 참 보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적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정신적 방어기재술(mental defense mechanism)을 구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카시라는 사람의 존재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역으로 우파들에게는 구구절절한 반론따위 보다는 "너 매카시지?"하는 손가락질 하나가 더 효과적으로 먹히게 되었다. 이런 매카시같은 꼴통 새끼 같으니라구..라는 단정에는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사파를 주사파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과도 직결된다. 그래서 170석의 거대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 병신들의 사모곡이 구슬퍼지는 이유가 된다.

혹시라도 이런 매카시 운운 소릴 듣게될까봐 미리 포석을 두시는 분들도 보인다. 반통일 세력이라는 힐난보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한 시골 촌구석대기 상원의원과 동일선상에 놓여지는 수치를 조금이라도 덜어볼까 노심초사하는 머저리들이 우파를 대변한답시고 비싼 혈세를 받아 쳐먹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매카시, 또는 매카시즘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함에 있다. 매카시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했는데 등등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이상돈 교수가 아주 정리를 잘하신 노트가 있어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이상돈 교수의 매카시즘 요약)

다만, 李교수는 당시 피해자(?)였던 래티모어(Owen Lattimore)가 『중상모략에 의한 시련(Odeal by Slander)』이라는 저서에서 '매카시즘'을 최초로 거론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매카시즘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래티모어가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지의 카투니스트 Herbert L. Block이었다.
뭐 어쨌든 좋다. 용어를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니 말이다. 매카시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최근에 재평가 받게 된 이유는 李교수가 설명했지만 1995년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라는 미국의 1급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부터이다. (물론 국내외 좌빨들은 이 기밀문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전까지 매카시는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후퇴시킨 가장 수치스러운 정치인 중 하나로 인식됨이 보통이었을게다. 반세기가 지나 뚜껑을 열고 보니, 사실은 매카시가 지목했던 상당수의 정치인, 관료인사들이 소련의 간첩이었거나 그들과 내통한 사람들이었거나 공산주의자였음이 밝혀졌다.말 나온 김에 베노나 프로젝트 파일이라는 것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여기를 클릭)
                                                       <거미줄 처럼 얽힌 美 행정부내 간첩망>

특히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를 즐겨 애용한 래티모어는 사실 그 자신의 공산주의자 경력에 대한 혐의를 벗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위증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전직 소련 장군이었던 알렉산더 바민(Alexander Barmine)은 래티모어가 실제로 소련 군수사국원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데 이어,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번디즈(Louis Bundez)도 타이딩스 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래티모어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미국내 리버럴리스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베노나 프로젝트 파일이 공개되자, 래티모어의 주변에는 소련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몇몇 인사들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함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즘을 뒤엎고 자신을 궁극적으로 변호하는데 실패했다. 李교수도 밝혔다시피 극동문제 전문가 래티모어의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고 소련에 넘기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 종북좌빨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하고 많은 미국 의원들 중 하필이면 무명의 매카시가 이런 악역을 담당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매카시 의원의 정보는 당시 FBI 국장이었던 후버(John Edgar Hoover)가 제공했다는 설이 꽤 설득력있게 들린다.

매카시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인 1950년 2월 웨스트 버지니아의 휠링(Wheeling)연설에서 그는 서류뭉치를 들어보이며 자기 손 안에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205명의 빨갱이들 명단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한심좌빨 학자들께서는 이 서류는 명단이 아닌 술집 외상장부라고 희화화 하면서, 매카시의 새빨간 구라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실은 이 명단은 실존하고 있었으며, 1957년 FBI의 메모에는 단지 한명만 더 추가된 206명의 간첩 혐의자들의 명세가 적혀있었다. FBI는 2차대전 중 미국 행정부내에 암약중인 5명의 간첩을 파악했고, 1946년 Elizabeth Bentley 일당이 일망타진 되면서 81명이 추가되었다. 나머지는 베로나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서 파악된 인물들이다.

이 명단들은 FBI가 제공하지 않는 한, 무명의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가 알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후버는 매카시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며 지지활동을 하는 등 매카시가  상원의원에 재선되도록 도왔다. 젊고 혈기왕성한 대신 잘나빠진 WASP 기득권 세력에 반감을 가진 아일랜드계 촌뜨기 의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매카시는 후버의 전략에 충실히 협조했지만,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를 하는 바람에 실족하게 된다.

즉, 매카시 상원의원은 FBI의 얼굴마담이었을 뿐이고, FBI가 제공한 자료로 한바탕의 굿판을 신명나게 벌였을 뿐이었다. 당시 소련과 중국문제, 한국전쟁의 발발 등 긴박했던 국제정세는 이 푸닥거리에 미국 국민들이 몰입하도록 열심히 추임새를 거들었으며, 매카시와 공화당은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마크 랜디스(Mark Landis)가 지적했다시피, 매카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아주 적절한 사람이었다.

매카시나 후버가 반공주의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외교전략으로 채택했던 친소정책의 후유증이자 반작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없었더라면, 미국이란 사회가 어찌되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위축되고 기본권이 제약되는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급격한 팽창과 미국 행정부내의 광범한 간첩단 적발 사건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인식은 연방대법원과 의회, 행정부가 공유하였던 고로, 당시의 각종 판례와 정책으로 확인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 스스로가 매카시즘을 선택하고 지지하였던 것이다.


<덧>
FBI가 매카시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어느정도 확인이 된 상태이다. 매카시의 초대 조사팀장인 도널드 서린은 전직 FBI 직원이었으며, 다른 주요 참모들도 전직 FBI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매카시 위원회의 사무장이었던 루스 와트는 자신이 FBI로부터 상당한 량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받았다고 고백했다. 윌리엄 설리번은 매카시 청문회 당시 FBI는 매카시가 이용한 모든 자료를 제공해주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매카시의 자료가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그가 제공받은 FBI 자료의 진위성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매카시의 주장 중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거나 과장된 것으로 확인된 정보는 후버 국장이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있다. 하나는 사회적 파장을 크게 해 국가적 이슈를 극대화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는 진성 간첩들을 압박하고, 그들과 연결된 관련자들의 네트워크를 단절하여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버의 이러한 도박은 보기좋게 성공했고, 매카시는 그 대신에 총알받이가 된 셈이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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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안무 2008.12.11 1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의미에서 현 각하께서 차기 정부를 위한 질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하실까요.. 희망의 싹은 노랗습니다만.. 내년까지 더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요. 기업가 출신들은 매사에 좋게좋게 해결하려는 타성이 몸에 배여서 문제입니다. 정치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될텐데..

  2. 리드 2008.12.11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초'라는 말은 스페인어 'Machismo'의 약어인데, 원래는 그냥 '남자다운'이란 뜻밖에 없다죠.
    마리 앙투와네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텐데'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란 알고 보면 호사가들의 뻘소리로 윤색된 내용들이 많지요. 이런게 많을수록 저같은 마이너 아마츄어들이 창궐하는 것이고요.

  3. organizer 2008.12.11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하지 않으면 모를 그런 사실들이군요... (감탄 그 자체..)

    VERONA인가 뭔가 하는 공개된 문서는 '먹칠'이 과도하군요..^^ <--- 여전히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소리로 보입니다.

  4. 2008.12.11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이성이 지배할 정도의 세상이었으면 공산주의가 태동하지도 않았겠지요. 모순을 천착하고 해결한다고 일어난 사람들이 또다른 모순을 낳고...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는게 또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당장 자기집 안방에 도둑이 준동한 상황이라 그럴 준비나 여유가 없었겠지요.

    • 미친과학자 2008.12.11 2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둑을 잡기위해 허둥지둥 난리치다 보니 애꿏은 집안식구들이 도둑잡기 위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꼴이군요....확실히 방법론적인 미숙함이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 眞明行 2008.12.11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 당시에는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니면 아마 소탕이 어려웠을겁니다. FBI는 간첩명단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것을 FBI의 명의로 공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요. 이것은 후버 국장이 의회에서 한 연설문에도 나오는데요, 안보사범과 일반 범죄자는 다르며, 접선자들, 정탐목적, 정보원, 교신방법등을 알아내는 것이 그들을 체포하고 공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지요.

      후버는 간첩 관련자들에게 교묘히 압박을 하면서 그들의 네트워크를 단절시키는데 매카시를 이용한 것입니다. 매카시가 무식하게 휘젓고 다니는 동안 진짜 간첩들은 부산하게 움직였을 것이고, FBI에게 더 용이하게 이것을 포착할 수 있었겠지요. 즉, 떡밥을 던진 것입니다.

    • 미친과학자 2008.12.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맥락에서 보면 간첩 잡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면서 TV에 울며 사죄하는 여간첩 사진까지 내보내는 얼마전의 사건은 병짓이 확실하군요..ㅡㅡ;;

  5. 2008.12.11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좋은 지적입니다. 실제로 베노나 프로젝트 문서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시하는 학자들 (대표적으로 William Kunstler)같은 사람들이 몇몇 있습니다. Alger Hiss의 경우 죽기전까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별 짓을 다했다고 합니다.

  6. reske 2008.12.11 1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모 신문에서 매카시가 간첩으로 지목한 사람들 중 실제 간첩들도 분명히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음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7. 한단인 2008.12.11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그럼 궁금한게 있는데요. 57년 FBI 문건에서 1명 추가된 206명의 간첩혐의자를 추려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인원에서도 실제 간첩으로 드러난 사람은 몇명인지 알 수 있나요? 간첩혐의자가 곧 간첩인 건 아니니까요.

    포스팅대로라면 매카시가 뒤집어 쓴 면이 없잖겠습니다만, 언어란 모종의 계기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기 때문에 매카시즘이란 용어의 함의가 해소되자면 실제 간첩인자와 그렇지 않은데 의심을 받아 사회적 제약을 받은 사람들의 비율이 문제가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뭐, 진명행님 포스팅은 매카시즘에서 매카시란 인물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니 용어자체는 수정이 있어야하긴 하겠습니다만,,

    • 한단인 2008.12.11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를] 에 대해서는 전 자세히 아는바가 없는데 매카시즘의 언어적 함의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초래한 오버도 포함이 되려나요?

    • 미친과학자 2008.12.11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가 미국사회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의 사상비판 + 사회적 배타성을 만들어 버린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매카시가 나중가서는 아이젠하워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그점에 한해서는 오버질 + 자폭이 맞는거겠죠.

    • ghistory 2008.12.11 2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부 전체를 공격한 게 몰락의 계기였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眞明行 2008.12.11 2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부전체와 자신이 속한 상원의원 전원에 대해 조사해보자고 했지요. 그때까지 좋다고 손뼉치던 양반들이 자신에게 칼 끝을 겨누자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사실 군내에 좌익인사들이 상당히 많았지 않습니까? 행정부가 저 모양인데 매카시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뭐라 장담은 못하죠.

    • 미친과학자 2008.12.11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구경하다가 제대로 데인 꼴이군요....확실히 당시 미국사회에 있어 공산주의에 대한(이라기 보다는 정확히는 소련이겠지만) 공포심이 지나치게 작용한 부분이 있지 싶습니다.

    • 眞明行 2008.12.11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첩들이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지나친 대응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르죠. 당시 국제정세는 누가 봐도 공산주의 세력의 급팽창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8. 2008.12.11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Eraser 2008.12.12 0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카시가 '빨간색 벗기기' 에 열중하다가 상원의원 자리도 내어주고 만거군요.. 그것보다 미의회 상원의원이라는 사람도 결국은 FBI 얼굴마담 + 빨간역적 사냥용 스페어...일줄은 -.,-

    • 眞明行 2008.12.12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은밀히 덕을 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매카시나 후버를 닮은 사람들을 꽤 많이 보게됩니다.

  10. Eraser 2008.12.12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핑백의 '바보'께서는 또 재미없는 떡밥질이나 하고 있으시군요. 저러면 좋을까나..)

  11. 銀王 2008.12.12 1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앨저히스에 대해 첨언하자면 카이버드의 주장은 베노나 프로젝트를 살펴볼때 앨저히스가 아닌 와일더푸트가 간첩(코드명 알레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이며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0819460322470.htm

    얼 헤인즈는 이에 반박하는 주장을 실었는데

    http://jeffersonflanders.wordpress.com/a-comparison-alger-hiss-wilder-foote-and-ales/
    http://hnn.us/articles/37456.html

    카이버드의 주장에 대해선 Gorsky가 앨저 히스가 돌아온 걸 몰랐을 가능성이 크고 간첩단의 정보전달체계 때문에 사실전달이 늦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와일더푸트가 알레스라고 한다면 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眞明行 2008.12.12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銀王님. 좋은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Hiss만큼 논란이 많았던 인물들도 드물죠. 2005년에 출간된 G. Edward White의 "Hiss Alger Hiss's Looking-Glass Wars"을 해외주문한 상태인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주신 자료는 잘 읽겠습니다.

  12. 돈키호테 2008.12.12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도 있긴 하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네요.

    10명의 사람 중 1명이 간첩이라고 했을 때.

    1명을 잡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10명을 다 족치는거네요.
    그건 9명의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다치는겁니다.

    간첩보다 더한 악질 범죄자죠.

    그리고 당시의 미국은 소련이라는 전무후무한 적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에 그 정도 적수가 있는지는 의문이네요. (중국이 적수로 부상할 수도 있긴 하지만...)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북한이 한국의 적수라고 보기엔 어렵죠.

    • 眞明行 2008.12.12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스팅 본문의 내용은 10명의 사람중 9명이 간첩이고 1명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반대로 말씀하신듯 하군요. 평시라면, 1명씩 조사해서 솎아내는 것이 맞겠지만, 종양의 번식속도가 면역세포의 증식보다 빠를 때는 멀쩡한 생살을 도려내는 경우도 무시할 순 없겠지요.

      정부 한복판에 간첩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온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은 매카시 이전에도 간첩법과 반역선동법을 적용해 800명의 좌익분자들에 대해 단칼로 목을 친 사례도 있었습니다.

  13. 2012.08.03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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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2.08.03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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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2.08.03 0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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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12.08.07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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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12.08.07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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