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09.01.17 00:49
일제 말기, 중추원 사상조사위원회에 보고된 쇼와 19년(1944년)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자료에 의하면 수집된 유언비어로서 ①김일성은 영웅이다라는 소문 ②미혼여성은 징용한다는 소문 - 이로 인한 조혼(早婚) 풍조, ③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①은 그런갑다 할만하지만..②번은 좀 의외다. 미혼여성을 징용한다는 소문은 아마도 정신대나 위안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를 유언비어로 중추원에 공식보고 했다는 것은 위안부 징용은 거짓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죽자사자 시위하는 할마시들 무서워 함부로 얘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동 자료에는 ①에 대해서 조금 상술한 얘기들이 있다. 김일성 가짜설을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면 안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필기체로 되어 있어서 대학교수들도 해석하지 못한 내용을 올해 92세인 김병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강의 뜻을 파악했다.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한국어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분이셔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金日成-본명,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 父는 撫松의 의원, 母는 龍山 어쩌구 저쩌구(해석불가) 장덕학교, 길림중학교 다니다가 공산비에 참여. 쇼와 10년(24세)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부하 수백명), 만주 치안확립 후(즉, 숙정공작 이후) 소련에 들어가서 첩자양성소 교관이 됨. 쇼와 11년~12년사이에 국경지대에 자주 출몰하다 혜산사건(보천보전투, 쇼와 12년) 당시 조선으로 침입하여 소요하고 도주함."

이 자료에 의하면, 서대숙이나 이종석이 얘기하는 바, 김일성의 실체설을 확실히 뒷받침 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는데, 혜산사건을 다룬 사상휘보(1939년)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임.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이 가능하니, 굳이 여기서 따로 그 내용을 이미지 파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다만, 동북항일연군에도 김일성이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섣불리 이 자료를 100%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자료가 틀렸다는 것을 반증할 자료가 나오지않는 한,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도 바람직 하지 않은게 사실. 이명영의 연구는 증언 위주의 채록이 한계이기는 하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가치는 있음. But 서대숙이나 이종석의 연구를 뒤집기는 무리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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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지화랑 2009.01.17 0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예전에 장지량 장군 회고록을 보니까 광복 즈음에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사를 나와서 만주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지금 50대쯤 되셨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구절이 기억나는군요.

    • 眞明行 2009.01.1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김일성의 실체야, 남측인사들과 북측인사들의 주장이 상당히 엉켜있어서 말이죠. 그런데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임은의 주장이나, 중국쪽 자료들, 일본측의 공식자료들을 보면 아무리 봐도 김일성=김광서=김경천說에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체역사를 빙자한 판타지물 주제로 써먹기엔 좋지 않을까요? ㄲㄲㄲ?

  2. 야스페르츠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단속의 대상"이 될 정도의 소문이라면 반드시 "유언비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흔히 하는 말처럼, 뭔가 구린게 있으니까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거라는.... 2번 문제와 관련되서는 왠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라기 보다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군요)

    • 眞明行 2009.01.17 0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그런가요? 뭐 우리야 그냥 웃어넘길 수 밖에..

      사실 단속의 대상이란 말은 없고(편의상 제가 집어넣은 말입니다만..) 조선의 사상범이나 불온통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런 얘기가 있더라는 정보를 중추원에 보고하는 자료인 것을 감안하면 함부로 예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리도 '유언비어'로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뭐. -ㅁ-;;

    • 眞明行 2009.01.17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죠? 1944년?

    • 천지화랑 2009.01.17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장 피를 많이 본 임팔작전이 1944년 3~6월이었죠. 그런데 또 '남방전선'이란 단어가 또 동남아쪽만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한다면 이미 1942년 이후로 일본군은 해전에서 계속 수세에 몰렸으니까요.

  3. 2009.01.17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새벽안개 2009.01.17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석의 애매함이 있네요. 유언비어 일수도 있고,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일수도....

    • 眞明行 2009.01.17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김일성 영웅론은 확실히 과장된 정보에 낚였을 확률이 많지요. 반면에 남방전선 전사자수와 관련된 것은 구체적인 범위와 내용을 알수가 없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봅니다. 1944년 말경에 작성된 자료이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건에 대해서는 저 문서의 내용만 가지고는 섣불리 확언하기가 어렵군요.
      추가로 조사해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용상으로는 적어도 강제징용이 중추원 차원에서 그 여부를 알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5. 한단인 2009.01.17 0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일단 유언비어란 의미가 사전적 의미로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 일반에 유포되고 있다는 것과 달리 저기에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퍼지면 총독부가 곤란해질 만한 '소문'을 의미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네요. 언급하신대로 남방전선 껀의 경우는 실제로 전사자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6. 니미츠 2009.01.17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조심스럽게 남겨봅니다. 사실 남방전선 전사자 자체, 아니 태평양전쟁 자체도 초기에 승승장구할때도 그렇게 적지 않다고 알고 있어서요; 임팔이야 화룡점정이지만(대한민국 건국공신 무다구치 렌야), 3은 확실히 곤란해질만한 소문이었던거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연쇄적으로 2도 좀...

  7. organizer 2009.01.17 0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정보'도 다 보고서로 만들어 보고하는 군요..... <--- 기록 문화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인 듯... ;;

    • 眞明行 2009.01.17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애들의 일제시대 사료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어서 매우 놀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8. Joker™ 2009.01.17 1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팔작전이 벌어진던 1944년 경이면 이미 솔로몬-라바울 방면을 포함한 일본군은 붕괴가 결정된 상태였고 기실 임팔작전은 '이거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정말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상태에서 강행한 작전이었죠.

    1942년 중, 후반의 과달카날 전선이 전개되며 이때부터 뉴기니, 동남아 방면에서도 급격히 전력의 소모가 이루어졌으니 1943년부터 이미 슬슬 정보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 히라쿠시 중좌의 대본영 보도부를 다시 꺼내봐야지..............

    • 眞明行 2009.01.17 1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1943년경 일본군 패주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가 무려 유언비어 살포죄로 투옥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9. 슈타인호프 2009.01.17 1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사자 수의 "급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지상전일 겁니다. 윗분들이 말씀하신 임팔 작전 이외에 사이판 함락(44년 6월) 같은 경우 만 단위의 병력이 손실됐죠.

    • 眞明行 2009.01.17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육상전의 경우 그 이전부터 쳐발리기 시작해서요.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죽을 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 reske 2009.01.17 1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안부 강제동원의 경우... 이영훈교수의 경우 저서에서 (군경에서 나서서 집행한)강제동원은 거의 없었으며 취업사기+협박이 주된 동원수단이었다고 하는데.. 글쎄 교과서에 나온 위안부 증언같은걸 보면 그냥 다짜고짜 끌려갔다는 사람도 있었던걸로 기억하거든요.. 어느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상으로 보아 사람사냥이 있었다 하더라도 취업사기가 주된 동원방법이었던 듯 싶더군요.

  11. 예니체리 2009.01.17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징용-조혼이라고만 써져 있는데 그걸 위안부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요?

  12. 미친과학자 2009.01.17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봐도 3번은 루머가 아니지 싶은...ㅡㅡ;;;; 전사에 빠삭하진 않지만 포트 모레스비 이후로 일본군은 남방에서는 계속 밀리기만 했지 싶은데 말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생각해봐도 1942년때의 일이니.....

    • Joker™ 2009.01.17 1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완전히는 아니죠.

      1944년 마리아나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기 전까지, 일본해군은 전략적으로 점차 불리해지는 와중에 '미 해군 창군 이래 최대의 치욕'이라 불리는 사보 해전의 대승을 비롯해 몇 차례의 야간해전과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기는 했습니다. 1943년도까지는 태평양에서 오히려 일본해군의 전력이 더 우위였거든요.

      실제로 도조 히데키 내각은 절대국방권을 성립하면서, 이곳에서는 미 해군을 '정말로'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ㅅ-;;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었죠. 호위항모를 하루에 1척 단위로 뽑은 나라라서;; (먼산)

      덧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수리한 함들+신조함들의 훈련에 바빴습니다. 1944년 이후로 이 전력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게임 끝 'ㅅ' /

    • 미친과학자 2009.01.17 2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참 그게 있었군요.

      ....그런데 그런 전력을 가지고 왜 빌빌댄거지...역시 대함 거포주의에 묶인 인생의 종말인가 ㅡㅡ;

    • 천지화랑 2009.01.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의 그 강력한 전력이라는 건 말하자면 '더 이상 재고 올릴 라인이 없는 창고'였죠. -ㅁ-;; 당장 가용전력 자체는 강력한데 뒷받침해 줄 게 아무것도 없달까요. 예를 들면 비행기든 조종사든 -_-;;

    • 미친과학자 2009.01.18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신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결론 : "닥치고 물량"(뭣)

  13. 2009.01.18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낙 전문분야도 아니고, 뻘 포스팅 같아서 일단 비공개로 돌렸습니다만, 출처라든가 자료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14. 2009.01.18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땅굴 얘기가 나와서, 미국 뉴스그룹의 소스를 조사하던 도중에 이상한 얘기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재미삼아 쓸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내렸습니다. ^^; 전역하셨어도 당시 취급하시던 정보들을 발설하시면 안되겠지요?

      포스팅에 썼던 얘기들은 주간동아에서 이미 오래전에 보도했던 것이고, 원 출처를 찾아보니 pdf로 만들어져있더군요. 딱딱한 전술전략이 아니라 그래픽 위주(예컨대 북한군의 견장이라든가 전술도해 같은 것들이 있어 재밌더군요. 원하신다면 링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5. 2009.01.18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7/nkor.pdf

      링크가 언제 짤릴지 모르니 다운받아서 저장해놓으시는게 좋을 듯합니다.

  16. 2009.01.19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7. 2009.01.19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인.물.평.론 2009.01.02 00:07
☞ Vermin씨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 본격 김구=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설 : 외수횽은 빨리 쳐보십니다

치하포 사건이란  백범일지에 의하면 1896년 3월 8일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여관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 조료(土田讓亮)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문제는 백범일지가 이 사건을 의거에 가까운 영웅적 행동으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음에 반하여, 당시 재판기록인 공초문서라든가 일본측 1차사료에 의하면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데 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김구가 살해한 쓰치다(土田讓亮)의 정확한 신분이다. 현재로서는 백범일지 외에 "육군중위설"을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다. 공초기록이나 다른 자료에도 육군중위를 거론하는 대목이 없다. 정황상으로도 "일군 장교"가 "그렇게 많은 돈을 지니고" 고작 변방을 염탐하기 위해 위장 침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내 학자들도 육군중위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도진순(1997)에 의해 쓰치다(土田讓亮)를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떻게하든 쓰치다의 신분을 일본의 국익을 위해 복무하는 세작으로 둔갑시켜, 김구의 살인을 정당화시키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도진순의 연구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계림장업단이 설립시기를 오해하고 있다. 둘째는 계림장업단의 임무와 설립목적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이 보인다. 셋째는 인용한 논거의 해석적 오류이다. 첫째 + 셋째의 지적은 같이 연관시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도진순은 "동경 소재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자료에 의하면 쓰찌다는 계림장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확언한다. 그런데 그 근거를 ③번 밑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계림장업단이 일본 제국주의의 끄나풀이었다는 식의 복선을 깔아준 후 "1896년 치하포사건 직후 평양 지역에 일본 행상인은 총 73명이었는데, 모두 계림장업단 단원이었다"  따라서 쓰치다도 그 단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리를 한 것이다. 결국 김구가 죽인 쓰치다는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도진순이 인용한 위 자료는 표지와는 달리 1896년 6월 29일에 작성된 자료이다. 도진순은 치하포사건 발생 직후라 설명하고 있지만 6월말과 3월초는 시간적으로 매우 많은 차이가 난다. 계림장업단은 조선 내지에 진출한 일본 행상인들의 상권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1896년 4월 29일 福井三郞 등 48명이 인천에서 최초로 조직한 단체이다. (註: 4월 29일은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날이며, 정식출범은 5월 17일이다. 출범일 당시 단원은 219명)

이 단체가 37명의 단원으로 평양에 제1대구(大區)를 조직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인 1896년 5월 22일이었다. 따라서, 쓰치다가 살해된 1896년 3월 8일은 평양에 계림장업단이란 조직이 있지도 않은 때였다. 3월 8일이면, 일본 행상인들이 본국의 훈령을 받고 인천으로 한참 철수 중이었을 때다. 쓰치다 역시 조선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철수를 하다가 황해도의 한 여관에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도진순은 계림장업단의 설립 목적이 ①일본 상인들의 자위(自衛)를 도모하고 상권(商權) 확대와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를 모집하는 조직이었다라고 하지만, 이는 바른 설명이 아니다. 계림장업단의 설립목적과 임무는 시기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도진순이 좀 오버한 게 아닌가 싶다.

계림장업단이 수집한 정보는 군사관련 정보가 아니라, 상황(商況) 및 민정(民情)과 관련된 정보다. 게다가 이런 정보수집 임무는 1897년에 이 단체가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관변화될 무렵에 부여받은 것이므로, 초기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

계림장업단은 단체의 위세와 규모가 커지면서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에 연연하다가, 정치색을 띤다는 이유로 1898년 3월부로 보조금이 중단되면서 해체위기에 직면한다. 계림장업단의 필요 이상의 오버질에 넌더리가 난 일본 영사 및 공사들이 일본 정부에 비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加藤增雄  일본공사는 "종래의 경험에 의하면, 日·韓人간의 갈등은 십중팔구 日人의 도발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該團(계림장업단)의 조직 중 자위 혹은 방어 등의 핑계로 거기에 일종의 의미를 함축시키려는 것은 오로지 團의 성립상 필요없을 뿐 아니라 외교상으로 매우 불온한 혐오감이 있으므로 이들의 형적을 제거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하면서 계림장업단의 활동범위를 매우 축소시키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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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안무 2009.01.02 0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범일지에는 일본인의 생피를 마신 협기행각을 기술해 놓았습니다만 다행히 문초기록을 보니 그런 내용은 없더군요. (........)

    문초 내용을 보면 결국 좋게 말해 객기에 맘에 안드는 외국인을 죽인 살해행각 - 이건 김구가 후에 독립운동에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미화할 수 없는 범죄행위겠지요.

    • 眞明行 2009.01.02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기억으로는 생피를 마신게 아니라, 쓰치다를 살해한 후 낭자한 피를 얼굴에다 쓰윽 묻히고, 투숙객들을 상대로 누가 나한테 까부냐? 일갈을 내치는 바람에 다들 쫄아서 벌벌 떨었다는군요. 김구의 치하포사건은 의거라기 보다는 실수에 가까웠습니다. 찬양할 일과 잘못된 일은 구분해야하죠.

      막무가내로 미화하는 분들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 티안무 2009.01.02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린이를 위한 백범일지'에는 그 인혈을 마시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더군요 -ㅅ-;;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된 땅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셨다.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구절을 얘들 보라고 집어넣는 놈들은 도대체가 뭔 정신인지 -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knu=03030244&menu=cview&encrt=zMv92a150wbTmAzYMDI0NCZzZWNzdWJudW09MTE=&query=%B1%E8%B1%B8%20%C7%C7%B8%A6%20%B8%B6%BC%CC%B4%D9#middle_tab

  2. 천지화랑 2009.01.02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백범일지 읽으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죠. 대체 일본육군 중위가 그 동네에는 왜 갔을까. -_-;;

    • 眞明行 2009.01.02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육군중위설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죠. 첩자나 밀정은 대부분 언제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말단이나 하위직급을 쓰는 것이 일반 통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말이 안되는 점이 많습니다.

  3. 한단인 2009.01.02 0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림장업단의 필요 이상의 오버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공사들이 넌더리를 낼 정도의 오바라..뭔 짓을 했길래..?

  4. 천지화랑 2009.01.02 0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이오공감 올라갔는데 이번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런지 궁금해지는군요. 쩌업. -_-;;

  5. Esperos 2009.01.02 0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번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전에 어떤 무리가 했듯이 모든 게시물을 반대하기를 해 보고 싶어지는군요. 그러다가 제가 이글루에서 짤리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요.

    • 眞明行 2009.01.02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 단, 이글루스 운영진에게 정식으로 건의를 하거나 본사를 방문하여 취지를 설명해볼까 합니다.

  6. 반동분자 2009.01.02 0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친필본 그게 궁금해지는 군요... 저도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일반인들에게는 성역입니다.. 심지어 해방후의 행적까지도 성역이 되어 버렸습니다...항일 운동에 대한 정신과 업적은 존경하지만 모든것이 옳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이글이 폄하의 수단이 될거라고 생각해서 적극적 옹호론으로 변질시켜서 너희들은 친일이다라는 딱지가 날라올것으로 예상되는 포스팅 입니다.......-_-;;

    • 眞明行 2009.01.02 1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보주의자들도 해방 후 김구의 테러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분들은 많더군요. 물론 그런다고 이승만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 젊은 세대들의 무비판적인 추종은 눈에 거슬리는 점이 많습니다.

  7. 제갈교 2009.01.02 08: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까 이오공감에 올라간 것이 보였는데 지금은 내려갔네요. ;;;

    그나저나 아무리 그 나라 안에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인데, 저런 면에 일부러 정당성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을텐데요. -_-;;

    • 眞明行 2009.01.02 1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이오공감은 어차피 기대도 안했습니다. ^^

      2. 당연하지요. 위인을 위인시 하는 역사서술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8. 타누키 2009.01.02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론이 기대됩니다만 보긴 힘들겠죠...ㅡㅡ;;

  9. 천지화랑 2009.01.02 1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오오 아직도 역사밸리에서 살아있습니다!

  10. 반동분자 2009.01.02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의사 아들인 안준생이 변절했다고 하여 암살하려고 했고 백범일지에도 쓰여 있다고 하는데 만약 확실한 증거 없이 살인을 하려고 했다면 백범 김구선생의 한계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안준생이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다녔는지 고증이 필요할듯 합니다....

  11. 미친과학자 2009.01.02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쩝, 김구가 젊은 시절 혈기를 못이겨 일본인을 살해한 사실이 김구의 항일활동 전체를 깎아내리지는 않는다고 봅니다만, 저렇게까지 역사적 팩트를 무시하고 싶은것인지...

    그냥 무리한 신격화 열폭으로 자살골 넣는것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듯.

  12. 우왕구우웃 2009.01.03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츠메같은 10세키랑 안놀면 안되나열?

  13. 위서가 2009.01.03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이 되신다면 안익태와 애국가 문제를 한번 다뤄보시길.

    나츠메님 블로그에 별 같잖은 것들이 와서 댓글을 단 것을 보니 웃겼는데,
    그 중 애국가 예가 가장 인상적이었거든요.

  14. 2009.01.04 0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백범 2011.04.2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없는 딴소리 같겠지만, 김완섭이 억울하다는 증거가 나왔네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이 기사에는 지금

    "2004년 7월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당시 정현태 검사는 김씨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130032911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13&officeId=00032&pageNo=19&printNo=16186&publishType=00010&doNotReadAnyMore=notClose

    "도 교수는 1895년 백범이 살해한 왜인 쓰치다(토전양량)의 직위를 중위로 기록한 것을 '백범일지'의 대표적 오류로 들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쓰치다는 일본 계림장업단 소속의 상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도진순 교수가 찾아낸 자료만 보면 김완섭은 거짓말을 한게 아닌데...

  16. 그게 2011.06.16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거 그냥 강도 살인입니다.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0922u00_02.pdf

    구월 십륙일 인천 감리 리지정씨가 법부에 보고 하였는디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수 토전양량을 때려죽여 강물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 많이 뺏었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올리니 죠를 재판하여 달나고 하였더라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code=DLD&year=1896&month=11&day=07 당시 기사 지면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1107u00_02.pdf

    "그전 인천 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자칭 좌통령이라 하고 일상(일본상인) 토전양량(스치다 조료)를 때려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탈취한 죄로 교(교수형)에 차기로 하고"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002.000.000.000&lm_sSrchYear=&keyword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17. 그게 2011.06.16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his_code=PV_DJ&book_code=A011&item_code=005.002.000.000&keyword=&rid=005.002.000.000

    판결
    황해도 신천군 두나일소면(斗羅一所面) 청계동(淸溪洞) 1통 4호
    농업 해주읍 출생
    강도 및 강도미수
    안명근(安明根) 33세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금전 대출업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출생
    강도 배경진(裵敬鎭) 27세


    로 시작합니다.

    안악사건도 강도사건입니다. 안명근이 있었는데,김구도 그때 당시 참가했습니다. <강도미수 보안법 위반
    김구(金龜) 36세>라고 나오는군요.


인.물.평.론 2008.12.11 17:01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매카시즘이라는 용어에 대해 들어본다. 매카시즘의 용례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폭넓게 구사되고 인용되어지는 경우는 참 보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적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정신적 방어기재술(mental defense mechanism)을 구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카시라는 사람의 존재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역으로 우파들에게는 구구절절한 반론따위 보다는 "너 매카시지?"하는 손가락질 하나가 더 효과적으로 먹히게 되었다. 이런 매카시같은 꼴통 새끼 같으니라구..라는 단정에는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사파를 주사파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과도 직결된다. 그래서 170석의 거대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 병신들의 사모곡이 구슬퍼지는 이유가 된다.

혹시라도 이런 매카시 운운 소릴 듣게될까봐 미리 포석을 두시는 분들도 보인다. 반통일 세력이라는 힐난보다 매카시라는 미국의 한 시골 촌구석대기 상원의원과 동일선상에 놓여지는 수치를 조금이라도 덜어볼까 노심초사하는 머저리들이 우파를 대변한답시고 비싼 혈세를 받아 쳐먹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매카시, 또는 매카시즘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함에 있다. 매카시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했는데 등등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이상돈 교수가 아주 정리를 잘하신 노트가 있어 굳이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이상돈 교수의 매카시즘 요약)

다만, 李교수는 당시 피해자(?)였던 래티모어(Owen Lattimore)가 『중상모략에 의한 시련(Odeal by Slander)』이라는 저서에서 '매카시즘'을 최초로 거론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매카시즘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래티모어가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지의 카투니스트 Herbert L. Block이었다.
뭐 어쨌든 좋다. 용어를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안은 아니니 말이다. 매카시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최근에 재평가 받게 된 이유는 李교수가 설명했지만 1995년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라는 미국의 1급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부터이다. (물론 국내외 좌빨들은 이 기밀문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전까지 매카시는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후퇴시킨 가장 수치스러운 정치인 중 하나로 인식됨이 보통이었을게다. 반세기가 지나 뚜껑을 열고 보니, 사실은 매카시가 지목했던 상당수의 정치인, 관료인사들이 소련의 간첩이었거나 그들과 내통한 사람들이었거나 공산주의자였음이 밝혀졌다.말 나온 김에 베노나 프로젝트 파일이라는 것을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 (☞여기를 클릭)
                                                       <거미줄 처럼 얽힌 美 행정부내 간첩망>

특히 매카시즘이라는 용어를 즐겨 애용한 래티모어는 사실 그 자신의 공산주의자 경력에 대한 혐의를 벗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위증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전직 소련 장군이었던 알렉산더 바민(Alexander Barmine)은 래티모어가 실제로 소련 군수사국원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데 이어,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번디즈(Louis Bundez)도 타이딩스 위원회의 청문회에서 래티모어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미국내 리버럴리스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베노나 프로젝트 파일이 공개되자, 래티모어의 주변에는 소련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몇몇 인사들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함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즘을 뒤엎고 자신을 궁극적으로 변호하는데 실패했다. 李교수도 밝혔다시피 극동문제 전문가 래티모어의 경우 한반도를 포기하고 소련에 넘기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 종북좌빨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하고 많은 미국 의원들 중 하필이면 무명의 매카시가 이런 악역을 담당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매카시 의원의 정보는 당시 FBI 국장이었던 후버(John Edgar Hoover)가 제공했다는 설이 꽤 설득력있게 들린다.

매카시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인 1950년 2월 웨스트 버지니아의 휠링(Wheeling)연설에서 그는 서류뭉치를 들어보이며 자기 손 안에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205명의 빨갱이들 명단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한심좌빨 학자들께서는 이 서류는 명단이 아닌 술집 외상장부라고 희화화 하면서, 매카시의 새빨간 구라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실은 이 명단은 실존하고 있었으며, 1957년 FBI의 메모에는 단지 한명만 더 추가된 206명의 간첩 혐의자들의 명세가 적혀있었다. FBI는 2차대전 중 미국 행정부내에 암약중인 5명의 간첩을 파악했고, 1946년 Elizabeth Bentley 일당이 일망타진 되면서 81명이 추가되었다. 나머지는 베로나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서 파악된 인물들이다.

이 명단들은 FBI가 제공하지 않는 한, 무명의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가 알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후버는 매카시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며 지지활동을 하는 등 매카시가  상원의원에 재선되도록 도왔다. 젊고 혈기왕성한 대신 잘나빠진 WASP 기득권 세력에 반감을 가진 아일랜드계 촌뜨기 의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매카시는 후버의 전략에 충실히 협조했지만,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를 하는 바람에 실족하게 된다.

즉, 매카시 상원의원은 FBI의 얼굴마담이었을 뿐이고, FBI가 제공한 자료로 한바탕의 굿판을 신명나게 벌였을 뿐이었다. 당시 소련과 중국문제, 한국전쟁의 발발 등 긴박했던 국제정세는 이 푸닥거리에 미국 국민들이 몰입하도록 열심히 추임새를 거들었으며, 매카시와 공화당은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마크 랜디스(Mark Landis)가 지적했다시피, 매카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아주 적절한 사람이었다.

매카시나 후버가 반공주의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외교전략으로 채택했던 친소정책의 후유증이자 반작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없었더라면, 미국이란 사회가 어찌되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위축되고 기본권이 제약되는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급격한 팽창과 미국 행정부내의 광범한 간첩단 적발 사건은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인식은 연방대법원과 의회, 행정부가 공유하였던 고로, 당시의 각종 판례와 정책으로 확인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 스스로가 매카시즘을 선택하고 지지하였던 것이다.


<덧>
FBI가 매카시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관련자들의 증언으로 어느정도 확인이 된 상태이다. 매카시의 초대 조사팀장인 도널드 서린은 전직 FBI 직원이었으며, 다른 주요 참모들도 전직 FBI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매카시 위원회의 사무장이었던 루스 와트는 자신이 FBI로부터 상당한 량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받았다고 고백했다. 윌리엄 설리번은 매카시 청문회 당시 FBI는 매카시가 이용한 모든 자료를 제공해주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매카시의 자료가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그가 제공받은 FBI 자료의 진위성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매카시의 주장 중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거나 과장된 것으로 확인된 정보는 후버 국장이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있다. 하나는 사회적 파장을 크게 해 국가적 이슈를 극대화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는 진성 간첩들을 압박하고, 그들과 연결된 관련자들의 네트워크를 단절하여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버의 이러한 도박은 보기좋게 성공했고, 매카시는 그 대신에 총알받이가 된 셈이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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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안무 2008.12.11 17: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의미에서 현 각하께서 차기 정부를 위한 질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하실까요.. 희망의 싹은 노랗습니다만.. 내년까지 더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요. 기업가 출신들은 매사에 좋게좋게 해결하려는 타성이 몸에 배여서 문제입니다. 정치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될텐데..

  2. 리드 2008.12.11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초'라는 말은 스페인어 'Machismo'의 약어인데, 원래는 그냥 '남자다운'이란 뜻밖에 없다죠.
    마리 앙투와네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텐데'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란 알고 보면 호사가들의 뻘소리로 윤색된 내용들이 많지요. 이런게 많을수록 저같은 마이너 아마츄어들이 창궐하는 것이고요.

  3. organizer 2008.12.11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하지 않으면 모를 그런 사실들이군요... (감탄 그 자체..)

    VERONA인가 뭔가 하는 공개된 문서는 '먹칠'이 과도하군요..^^ <--- 여전히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소리로 보입니다.

  4. 2008.12.11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이성이 지배할 정도의 세상이었으면 공산주의가 태동하지도 않았겠지요. 모순을 천착하고 해결한다고 일어난 사람들이 또다른 모순을 낳고...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는게 또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당장 자기집 안방에 도둑이 준동한 상황이라 그럴 준비나 여유가 없었겠지요.

    • 미친과학자 2008.12.11 2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둑을 잡기위해 허둥지둥 난리치다 보니 애꿏은 집안식구들이 도둑잡기 위해 휘두른 몽둥이에 맞은 꼴이군요....확실히 방법론적인 미숙함이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 眞明行 2008.12.11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 당시에는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니면 아마 소탕이 어려웠을겁니다. FBI는 간첩명단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것을 FBI의 명의로 공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요. 이것은 후버 국장이 의회에서 한 연설문에도 나오는데요, 안보사범과 일반 범죄자는 다르며, 접선자들, 정탐목적, 정보원, 교신방법등을 알아내는 것이 그들을 체포하고 공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지요.

      후버는 간첩 관련자들에게 교묘히 압박을 하면서 그들의 네트워크를 단절시키는데 매카시를 이용한 것입니다. 매카시가 무식하게 휘젓고 다니는 동안 진짜 간첩들은 부산하게 움직였을 것이고, FBI에게 더 용이하게 이것을 포착할 수 있었겠지요. 즉, 떡밥을 던진 것입니다.

    • 미친과학자 2008.12.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맥락에서 보면 간첩 잡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면서 TV에 울며 사죄하는 여간첩 사진까지 내보내는 얼마전의 사건은 병짓이 확실하군요..ㅡㅡ;;

  5. 2008.12.11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8.12.11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좋은 지적입니다. 실제로 베노나 프로젝트 문서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시하는 학자들 (대표적으로 William Kunstler)같은 사람들이 몇몇 있습니다. Alger Hiss의 경우 죽기전까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별 짓을 다했다고 합니다.

  6. reske 2008.12.11 1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모 신문에서 매카시가 간첩으로 지목한 사람들 중 실제 간첩들도 분명히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음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7. 한단인 2008.12.11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그럼 궁금한게 있는데요. 57년 FBI 문건에서 1명 추가된 206명의 간첩혐의자를 추려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인원에서도 실제 간첩으로 드러난 사람은 몇명인지 알 수 있나요? 간첩혐의자가 곧 간첩인 건 아니니까요.

    포스팅대로라면 매카시가 뒤집어 쓴 면이 없잖겠습니다만, 언어란 모종의 계기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기 때문에 매카시즘이란 용어의 함의가 해소되자면 실제 간첩인자와 그렇지 않은데 의심을 받아 사회적 제약을 받은 사람들의 비율이 문제가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뭐, 진명행님 포스팅은 매카시즘에서 매카시란 인물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니 용어자체는 수정이 있어야하긴 하겠습니다만,,

    • 한단인 2008.12.11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를] 에 대해서는 전 자세히 아는바가 없는데 매카시즘의 언어적 함의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초래한 오버도 포함이 되려나요?

    • 미친과학자 2008.12.11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후버가 기대한 이상의 오버"가 미국사회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의 사상비판 + 사회적 배타성을 만들어 버린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매카시가 나중가서는 아이젠하워까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그점에 한해서는 오버질 + 자폭이 맞는거겠죠.

    • ghistory 2008.12.11 2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부 전체를 공격한 게 몰락의 계기였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眞明行 2008.12.11 2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부전체와 자신이 속한 상원의원 전원에 대해 조사해보자고 했지요. 그때까지 좋다고 손뼉치던 양반들이 자신에게 칼 끝을 겨누자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사실 군내에 좌익인사들이 상당히 많았지 않습니까? 행정부가 저 모양인데 매카시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뭐라 장담은 못하죠.

    • 미친과학자 2008.12.11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구경하다가 제대로 데인 꼴이군요....확실히 당시 미국사회에 있어 공산주의에 대한(이라기 보다는 정확히는 소련이겠지만) 공포심이 지나치게 작용한 부분이 있지 싶습니다.

    • 眞明行 2008.12.11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첩들이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지나친 대응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르죠. 당시 국제정세는 누가 봐도 공산주의 세력의 급팽창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8. 2008.12.11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Eraser 2008.12.12 0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카시가 '빨간색 벗기기' 에 열중하다가 상원의원 자리도 내어주고 만거군요.. 그것보다 미의회 상원의원이라는 사람도 결국은 FBI 얼굴마담 + 빨간역적 사냥용 스페어...일줄은 -.,-

    • 眞明行 2008.12.12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은밀히 덕을 본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매카시나 후버를 닮은 사람들을 꽤 많이 보게됩니다.

  10. Eraser 2008.12.12 0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핑백의 '바보'께서는 또 재미없는 떡밥질이나 하고 있으시군요. 저러면 좋을까나..)

  11. 銀王 2008.12.12 1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앨저히스에 대해 첨언하자면 카이버드의 주장은 베노나 프로젝트를 살펴볼때 앨저히스가 아닌 와일더푸트가 간첩(코드명 알레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이며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0819460322470.htm

    얼 헤인즈는 이에 반박하는 주장을 실었는데

    http://jeffersonflanders.wordpress.com/a-comparison-alger-hiss-wilder-foote-and-ales/
    http://hnn.us/articles/37456.html

    카이버드의 주장에 대해선 Gorsky가 앨저 히스가 돌아온 걸 몰랐을 가능성이 크고 간첩단의 정보전달체계 때문에 사실전달이 늦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와일더푸트가 알레스라고 한다면 더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眞明行 2008.12.12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銀王님. 좋은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Hiss만큼 논란이 많았던 인물들도 드물죠. 2005년에 출간된 G. Edward White의 "Hiss Alger Hiss's Looking-Glass Wars"을 해외주문한 상태인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주신 자료는 잘 읽겠습니다.

  12. 돈키호테 2008.12.12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도 있긴 하지만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네요.

    10명의 사람 중 1명이 간첩이라고 했을 때.

    1명을 잡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10명을 다 족치는거네요.
    그건 9명의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다치는겁니다.

    간첩보다 더한 악질 범죄자죠.

    그리고 당시의 미국은 소련이라는 전무후무한 적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에 그 정도 적수가 있는지는 의문이네요. (중국이 적수로 부상할 수도 있긴 하지만...)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북한이 한국의 적수라고 보기엔 어렵죠.

    • 眞明行 2008.12.12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스팅 본문의 내용은 10명의 사람중 9명이 간첩이고 1명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반대로 말씀하신듯 하군요. 평시라면, 1명씩 조사해서 솎아내는 것이 맞겠지만, 종양의 번식속도가 면역세포의 증식보다 빠를 때는 멀쩡한 생살을 도려내는 경우도 무시할 순 없겠지요.

      정부 한복판에 간첩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온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은 매카시 이전에도 간첩법과 반역선동법을 적용해 800명의 좌익분자들에 대해 단칼로 목을 친 사례도 있었습니다.

  13. 2012.08.03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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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2.08.03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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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2.08.03 0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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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12.08.07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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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12.08.07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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