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09.09.13 19:20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과 관련하여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기술을 보면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으로 요약되어 있다. 국내에 간행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설명들도 이와 대동소이한데, 만약 이에 대한 이의나 반론을 거론한다면 이놈의 나라에서는 졸지에 매국노나 친일파 취급받기 십상이다.

수탈, 수탈하는데 대체 뭘 그리 수탈해갔고, 뭘 그리 착취해갔는지 학계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데이터나 실증자료를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식민지 조선에 설립된 제국의 국가기관들이 헤비타트 같은 봉사단체가 아닌 이상, 자국의 이익을 어느정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도떼처럼 몰려와서 세간살이를 다 들어내고 강탈해간 것처럼 피해상황을 쓸데없이 과장하고, 억지로 말을 만들고, 견강부회하는 식의 설명들이 학생들에게 막연한 적개심 외에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

1. 동척의 설립목적이 토지수탈과 소작료 착취에 있었나?

척식이란 말 그대로 외지에 버려진 땅을 개척하여 그곳에 자국인을 이주, 정착시킨다는 얘기다. 1900년 초 일본정부는 넘쳐나는 농업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해외의 농지를 개척하여 이들을 이주시키면 어떨까 하고 잔대가리를 굴린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척식회사다. 토착민의 반발을 우려하여 선량근면하고 농사경험이 풍부하며 어느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만 뽑아서 이주시키되, 일본의 우수한(?) 선진농법을 전수하여 주면 상호 win-win이 아니겠느냐 하고 시작한 것이다.

2. 과연 토지수탈인가?

수탈이란, 말 그대로 타인의 재화를 강탈해갔다는 말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인용예를 보자.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게 수탈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우선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1만 7714정보의 농지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배당료를 지불했으며, 출자예정지에 대해서는 소작료의 80%를 주고 유상으로 임차했다. 왜 100%가 아니냐, 착취아니냐며 따지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토지신탁이라는 것도 임대수익의 100%를 건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작지의 체납비율이라든가, 개간사업에 대한 투자비 회수, 관리비용 등을 감안했을 때 80%의 유상보상을 꼭 수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걔네들도 땅파서 장사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두번째, 일제가 1913년까지 확보한 4만 7148정보를 거저 빼앗아 간 것도 아닐텐데 이걸 강탈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중 논(畓) 3만 554정보와 밭(田) 12,563 정보는 실거래가를 감안하여 전부 유상보상하였다. 논은 1정보당 291원을 지급했고, 밭은 1정보당 129원을 지불했던 것인데, 일본의 농지거래가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후하게 쳐준 것이다.

그나마, 전국 각지의 불량배들과 모리배들이 개입해 토지매매를 방해하고, 투기꾼들이 극성을 부려 지가(地價)가 앙등하자 결국은 매수작업은 자금고갈로 중단되고 만다. 수탈이 목적이었다면 땅문서 갈아치우고 말뚝이나 박지 이런 식으로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었다고 하는데, 이 양자는 상호간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거꾸로 산림지를 매수해 경작지로 바꾼다음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불하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국유지 불하는 그 특별법에 의해 동척이나 일본인 지주들이 소유하는 것을 금하고 조선인을 포함 순수하게 자작을 원하는 소작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산림이나 황무지, 임야 소유도 개간을 위한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하다.

3. 소작료를 착취했나?

또한 네이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백과사전 저술에는 학자들이 참여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엉터리 기술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첫째로 강제로 빼앗은 토지가 아니다. 둘째로 소작인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고 하는데, 조선 후기와 비해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거니와 일본 본토의 사정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유독 일제시대의 조선 소작인인들에게만은 문제가 되는 것인가?

정약용은 후기 조선시대의 소작료 징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일제시대의 소작료 논쟁과 비교하여 참고할만 하다.

"원래 토지에 대한 주인은 국왕과 경작농민의 二主가 있을 뿐인데 부유한 자가 토지를 겸병하여 "租" 地代를 사사로이 수취하게 되니 토지에 三主가 있게 되고, 농민은 국세 이외에 私租의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관청이 징수하는 地稅는 법제상 총생산량의 약 20분의 1에 지나지 않은 가벼운 것이나 소작제도가 형성된 토지에서는 지주의 수취지대 즉, 私門之租는 50%이며 민곤국빈(民困國貧)의 모든 원인이 이 가혹한 소작지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공물과 각종 부담에 있어서도 잡다한 명칭의 징렴(徵歛)이 행하여져서 결국 그것이 생산량의 10분의 5에 달하고 있으니, 사적지주가 50%의 지대를 징수하고 관청도 50%를 징수하면 소작농(佃夫)는 무엇을 가지고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까"
 

두번째, 영세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다. 소작료를 현금이나 현물로 내지 못하고, 연체한 농민에게는 일종의 리볼빙을 실시하게되었고, 당시 금융권의 이율이 1년에 12% 정도였는데, 동척의 이자율은 조선은행이나 일본 내지 금융기관의 이자율에 비해 오히려 저렴한 편에 속하였다.

4. 그래서 악마의 화신인 동척을 일반 조선농민들은 어떻게 대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고 되어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동척의 설립초기 5년간 자금대부 현황을 보면, 1911년 46.1%, 1912년 47.9%, 1913년 64.4%, 1914년 59.6%, 1915년 57.4%를 조선사람들이 사용했다. 결코 적지않은 사람들이 동척의 자금을 사용하여 농지구입이나 운영비용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5. 일제는 동척의 설립을 한국정부에 강요했나.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라고 나온다. 그러나 이 강요하고..라는 표현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다. 오히려 한국정부가 황무지개간 사업에 적극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황무지개발 사업은 대한제국 탁지부에 조세징수권을 빼앗긴 궁내부가 일본공사와 결탁하여 황무지개간사업을 협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당초 협의안은 이렇다. 황무지의 개간사업은 한일합자 척식회사에 위임하되 개간사업시에 기술자, 감독원을 제외한 소요인력의 9/10를 한국인으로 충당하고, 개척된 토지에 대해서도 한국인이 경작을 희망하면 일정한 조건하에 불하 또는 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체 뭐가 강요란 말인가?

6. 동척은 성공하였나.

실패하였다. 저렴한 토지분양에 미혹되 이주한 일본 내지인들은 쌀 생산량 증대로 인해 쌀값은 급락한 반면에 치솟는 지대와 소작료와 각종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람이 나날이 급증하였다. 1927년 동척은 이주사업을 완전히 접고, 이주사업은 만주와 대만으로 무대를 갈아타게 된다. 이후 동척은 평범한 금융기관으로서의 위상이나마 갖추지만, 식산은행과 조선은행의 규모에 비하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동척의 사업으로 말미암아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작쟁의가 격렬하였다는 식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막연한 얘기일 뿐이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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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범 2009.09.13 1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이면 '전두환 장군님을 찬양하신' 똥녕이으 아부지가 다니시던 회사 아닙네까? ㅋㅋㅋ

  2. 피그말리온 2009.09.13 1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공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름 해외투자의 형식을 취한건데 실패한거라고 봐야겠네요.

  3. arche 2009.09.13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저런 기록들을 보면 조선후기사회가 워낙 엉망인지라 오히려 일제시대의 법과 행정이 훨씬 낫더군요. (독립운동 하신분 외엔 태평양전쟁 전까지는 괜찮게 산 편이더군요)
    만약 일제시대가 없었으면 남의탓 할게 없어서 심심할 사람들이 많을거 같습니다.

    • 검투사 2009.09.13 2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비가 "명성황후"가 되고, 이제는 "초콜릿과 와인을 음미할 줄 알았던,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왕비마마"로 기억되게 생긴 판인데요... -ㅅ-; "이 아이는 내 누이동생이오. 사는 게 어려워 궁녀로 입궐한 아이를 왜 이리 괴롭히시오?!"라는 항의에 "아~ 그렇군요. 지송~" 했던 군사들에게 누군가가 타임머신 타고 가서 진실을 알려줘야 하는...응?

    • 인민해방군 2009.09.14 2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법학을 전공하며 법학사를 보다 보면 지금의 법률체계는 일제시대에 완성된것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선말기의 법체계는 완전히 기득권층 몇몇만을 위한 법이었을 뿐이죠.
      현대적인 법체계는 일제시대에 온겁니다.

      왜놈들이 침략한건 맞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왜놈들이 왜 착하게 보일까 이럴때에?
      그것은 이들이 식민지 경영이라는것을 영국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죠.
      지들이 착해서 그런것이 아님.

    • BigTrain 2009.09.14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서 본 것 같은데, 왜정시대엔 승진하면 간단한 다과로 책상에서 승진축하 파티를 열었었는데, 독립하고 나니 고급 요정에서 승진축하 잔치를 열더라."는 식의 회고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근대국가의 시스템이 남아있었던 대한민국과 그 시스템이 모조리 무너져버렸던 북한과의 차이를 본다면야 뭐...

  4. reske 2009.09.13 20: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하긴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일제의 식민지 경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죠. 배후 생산기지로 만들려고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자원을 때려박았지만 결국 고스란히 대한민국 정부에 넘기고 와야 했으니..

    생각해보면 일본의 식민지 경영은 단순한 약탈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생산기반 건설에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근대적 제도의 이식, 기술자와 엘리트 양성,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을 보면..

    흠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동척이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받은 토지에 대해서는 배당금을 지불했다고 하셨는데요, 한일합방 이후 배당금을 수취한 주체가 누구죠? 대한제국의 이씨 왕가인가요? 아니면 총독부인가요?

  5. 제3의사나이 2009.09.14 0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한국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지요.
    진실을 말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에 얼마나 '진실'이 있을까 의문입니다.

  6. BigTrain 2009.09.14 2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영훈 교수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에 일부 실려있더군요.

    사실 이야기하는 내용은 거의 같은 이야기인데,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기존의 수탈론이나 착취론은 뭐랄까, 학술적인 서술방식은 아닌 것 같고 말이죠.

  7. 2009.09.15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곰표간장™ 2009.09.15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수탈과 강탈이 목적이었다면 회사따위는 필요없었겠죠.
    그냥 밀고들어가서 말뚝만 뚝딱뚝딱 박으면 끝이었을테니까요;;

  9. 2009.09.15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 我行行 2009.09.15 1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민민주공화국을 자칭하는 김씨왕조의 현물세가 소출의 50%라는 소문도 있지요.

  11. 여우비 2009.09.15 1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현상은 어느 쪽으로 바라보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비난하고 증오해야지요. (아무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한들 일제의 긍정적인 면이 부정적인 면을 덮을 순 없겠습니다만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1055&sc=n
    초끔 무개념인 것 같습니다. 횽님들, 요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해도 좋지만 이건 화해를 넘어선 엎드려서 빌기 같은데?

  12. 海凡申九™ 2009.10.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착취하니냐며(x)

    정정부탁드림미돠

  13. 백범 2009.10.24 1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하면... 아 정동영!!!

  14. 만슈타인 2010.03.08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척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봐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 자료의 근거가 어디신지만 좀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15. 짚신 2011.12.08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다.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보냐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진다.
    일제가 우리나라 민간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진자료와 수탈자료를 보고 글을 쓴다면 또다른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분명 일제가 근대적토지제도의 기반과 근대적법제도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은 맞지만 이 글에 나와있는 것처럼 정당하게 이 모든 과정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이 글쓴이가 당시 우리나라 서민이었다면 일제에 대해 이런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6. 흠냐 2012.12.07 16: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아닌듯.동양척식주식회사까지 변호를 하는건 아니네요.


근.현.대.사 2009.01.17 00:49
일제 말기, 중추원 사상조사위원회에 보고된 쇼와 19년(1944년)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자료에 의하면 수집된 유언비어로서 ①김일성은 영웅이다라는 소문 ②미혼여성은 징용한다는 소문 - 이로 인한 조혼(早婚) 풍조, ③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①은 그런갑다 할만하지만..②번은 좀 의외다. 미혼여성을 징용한다는 소문은 아마도 정신대나 위안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를 유언비어로 중추원에 공식보고 했다는 것은 위안부 징용은 거짓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죽자사자 시위하는 할마시들 무서워 함부로 얘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동 자료에는 ①에 대해서 조금 상술한 얘기들이 있다. 김일성 가짜설을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면 안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필기체로 되어 있어서 대학교수들도 해석하지 못한 내용을 올해 92세인 김병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강의 뜻을 파악했다.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아 일본어를 한국어만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분이셔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金日成-본명,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 父는 撫松의 의원, 母는 龍山 어쩌구 저쩌구(해석불가) 장덕학교, 길림중학교 다니다가 공산비에 참여. 쇼와 10년(24세)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부하 수백명), 만주 치안확립 후(즉, 숙정공작 이후) 소련에 들어가서 첩자양성소 교관이 됨. 쇼와 11년~12년사이에 국경지대에 자주 출몰하다 혜산사건(보천보전투, 쇼와 12년) 당시 조선으로 침입하여 소요하고 도주함."

이 자료에 의하면, 서대숙이나 이종석이 얘기하는 바, 김일성의 실체설을 확실히 뒷받침 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는데, 혜산사건을 다룬 사상휘보(1939년)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임.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검색이 가능하니, 굳이 여기서 따로 그 내용을 이미지 파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다만, 동북항일연군에도 김일성이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섣불리 이 자료를 100%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자료가 틀렸다는 것을 반증할 자료가 나오지않는 한,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도 바람직 하지 않은게 사실. 이명영의 연구는 증언 위주의 채록이 한계이기는 하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가치는 있음. But 서대숙이나 이종석의 연구를 뒤집기는 무리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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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지화랑 2009.01.17 0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예전에 장지량 장군 회고록을 보니까 광복 즈음에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사를 나와서 만주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지금 50대쯤 되셨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구절이 기억나는군요.

    • 眞明行 2009.01.1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김일성의 실체야, 남측인사들과 북측인사들의 주장이 상당히 엉켜있어서 말이죠. 그런데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임은의 주장이나, 중국쪽 자료들, 일본측의 공식자료들을 보면 아무리 봐도 김일성=김광서=김경천說에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체역사를 빙자한 판타지물 주제로 써먹기엔 좋지 않을까요? ㄲㄲㄲ?

  2. 야스페르츠 2009.01.17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단속의 대상"이 될 정도의 소문이라면 반드시 "유언비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흔히 하는 말처럼, 뭔가 구린게 있으니까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거라는.... 2번 문제와 관련되서는 왠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라기 보다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군요)

    • 眞明行 2009.01.17 0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그런가요? 뭐 우리야 그냥 웃어넘길 수 밖에..

      사실 단속의 대상이란 말은 없고(편의상 제가 집어넣은 말입니다만..) 조선의 사상범이나 불온통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런 얘기가 있더라는 정보를 중추원에 보고하는 자료인 것을 감안하면 함부로 예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천지화랑 2009.01.17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고 있다는 소리도 '유언비어'로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뭐. -ㅁ-;;

    • 眞明行 2009.01.17 0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남방전선 전사자가 격증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죠? 1944년?

    • 천지화랑 2009.01.17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장 피를 많이 본 임팔작전이 1944년 3~6월이었죠. 그런데 또 '남방전선'이란 단어가 또 동남아쪽만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하는 건지.... 태평양전선 전체를 말한다면 이미 1942년 이후로 일본군은 해전에서 계속 수세에 몰렸으니까요.

  3. 2009.01.17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새벽안개 2009.01.17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석의 애매함이 있네요. 유언비어 일수도 있고,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일수도....

    • 眞明行 2009.01.17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김일성 영웅론은 확실히 과장된 정보에 낚였을 확률이 많지요. 반면에 남방전선 전사자수와 관련된 것은 구체적인 범위와 내용을 알수가 없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봅니다. 1944년 말경에 작성된 자료이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위안부 강제징용 건에 대해서는 저 문서의 내용만 가지고는 섣불리 확언하기가 어렵군요.
      추가로 조사해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용상으로는 적어도 강제징용이 중추원 차원에서 그 여부를 알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5. 한단인 2009.01.17 0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일단 유언비어란 의미가 사전적 의미로 사실과 전혀 다른 거짓이 일반에 유포되고 있다는 것과 달리 저기에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퍼지면 총독부가 곤란해질 만한 '소문'을 의미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네요. 언급하신대로 남방전선 껀의 경우는 실제로 전사자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6. 니미츠 2009.01.17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조심스럽게 남겨봅니다. 사실 남방전선 전사자 자체, 아니 태평양전쟁 자체도 초기에 승승장구할때도 그렇게 적지 않다고 알고 있어서요; 임팔이야 화룡점정이지만(대한민국 건국공신 무다구치 렌야), 3은 확실히 곤란해질만한 소문이었던거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연쇄적으로 2도 좀...

  7. organizer 2009.01.17 08: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정보'도 다 보고서로 만들어 보고하는 군요..... <--- 기록 문화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인 듯... ;;

    • 眞明行 2009.01.17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애들의 일제시대 사료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어서 매우 놀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8. Joker™ 2009.01.17 1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팔작전이 벌어진던 1944년 경이면 이미 솔로몬-라바울 방면을 포함한 일본군은 붕괴가 결정된 상태였고 기실 임팔작전은 '이거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정말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상태에서 강행한 작전이었죠.

    1942년 중, 후반의 과달카날 전선이 전개되며 이때부터 뉴기니, 동남아 방면에서도 급격히 전력의 소모가 이루어졌으니 1943년부터 이미 슬슬 정보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 히라쿠시 중좌의 대본영 보도부를 다시 꺼내봐야지..............

    • 眞明行 2009.01.17 1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1943년경 일본군 패주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가 무려 유언비어 살포죄로 투옥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9. 슈타인호프 2009.01.17 1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사자 수의 "급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지상전일 겁니다. 윗분들이 말씀하신 임팔 작전 이외에 사이판 함락(44년 6월) 같은 경우 만 단위의 병력이 손실됐죠.

    • 眞明行 2009.01.17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육상전의 경우 그 이전부터 쳐발리기 시작해서요.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죽을 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 reske 2009.01.17 12: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안부 강제동원의 경우... 이영훈교수의 경우 저서에서 (군경에서 나서서 집행한)강제동원은 거의 없었으며 취업사기+협박이 주된 동원수단이었다고 하는데.. 글쎄 교과서에 나온 위안부 증언같은걸 보면 그냥 다짜고짜 끌려갔다는 사람도 있었던걸로 기억하거든요.. 어느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정황상으로 보아 사람사냥이 있었다 하더라도 취업사기가 주된 동원방법이었던 듯 싶더군요.

  11. 예니체리 2009.01.17 1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징용-조혼이라고만 써져 있는데 그걸 위안부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요?

  12. 미친과학자 2009.01.17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봐도 3번은 루머가 아니지 싶은...ㅡㅡ;;;; 전사에 빠삭하진 않지만 포트 모레스비 이후로 일본군은 남방에서는 계속 밀리기만 했지 싶은데 말입니다.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생각해봐도 1942년때의 일이니.....

    • Joker™ 2009.01.17 1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완전히는 아니죠.

      1944년 마리아나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기 전까지, 일본해군은 전략적으로 점차 불리해지는 와중에 '미 해군 창군 이래 최대의 치욕'이라 불리는 사보 해전의 대승을 비롯해 몇 차례의 야간해전과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기는 했습니다. 1943년도까지는 태평양에서 오히려 일본해군의 전력이 더 우위였거든요.

      실제로 도조 히데키 내각은 절대국방권을 성립하면서, 이곳에서는 미 해군을 '정말로'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ㅅ-;;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었죠. 호위항모를 하루에 1척 단위로 뽑은 나라라서;; (먼산)

      덧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수리한 함들+신조함들의 훈련에 바빴습니다. 1944년 이후로 이 전력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게임 끝 'ㅅ' /

    • 미친과학자 2009.01.17 2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참 그게 있었군요.

      ....그런데 그런 전력을 가지고 왜 빌빌댄거지...역시 대함 거포주의에 묶인 인생의 종말인가 ㅡㅡ;

    • 천지화랑 2009.01.18 0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의 그 강력한 전력이라는 건 말하자면 '더 이상 재고 올릴 라인이 없는 창고'였죠. -ㅁ-;; 당장 가용전력 자체는 강력한데 뒷받침해 줄 게 아무것도 없달까요. 예를 들면 비행기든 조종사든 -_-;;

    • 미친과학자 2009.01.18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신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의 결론 : "닥치고 물량"(뭣)

  13. 2009.01.18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워낙 전문분야도 아니고, 뻘 포스팅 같아서 일단 비공개로 돌렸습니다만, 출처라든가 자료가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14. 2009.01.18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땅굴 얘기가 나와서, 미국 뉴스그룹의 소스를 조사하던 도중에 이상한 얘기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재미삼아 쓸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내렸습니다. ^^; 전역하셨어도 당시 취급하시던 정보들을 발설하시면 안되겠지요?

      포스팅에 썼던 얘기들은 주간동아에서 이미 오래전에 보도했던 것이고, 원 출처를 찾아보니 pdf로 만들어져있더군요. 딱딱한 전술전략이 아니라 그래픽 위주(예컨대 북한군의 견장이라든가 전술도해 같은 것들이 있어 재밌더군요. 원하신다면 링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5. 2009.01.18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眞明行 2009.01.18 2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1997/nkor.pdf

      링크가 언제 짤릴지 모르니 다운받아서 저장해놓으시는게 좋을 듯합니다.

  16. 2009.01.19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7. 2009.01.19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인.물.평.론 2009.01.02 00:07
☞ Vermin씨의 블로그에서 트랙백 : 본격 김구=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설 : 외수횽은 빨리 쳐보십니다

치하포 사건이란  백범일지에 의하면 1896년 3월 8일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여관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 조료(土田讓亮)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문제는 백범일지가 이 사건을 의거에 가까운 영웅적 행동으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음에 반하여, 당시 재판기록인 공초문서라든가 일본측 1차사료에 의하면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데 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김구가 살해한 쓰치다(土田讓亮)의 정확한 신분이다. 현재로서는 백범일지 외에 "육군중위설"을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다. 공초기록이나 다른 자료에도 육군중위를 거론하는 대목이 없다. 정황상으로도 "일군 장교"가 "그렇게 많은 돈을 지니고" 고작 변방을 염탐하기 위해 위장 침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내 학자들도 육군중위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도진순(1997)에 의해 쓰치다(土田讓亮)를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어떻게하든 쓰치다의 신분을 일본의 국익을 위해 복무하는 세작으로 둔갑시켜, 김구의 살인을 정당화시키고자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도진순의 연구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계림장업단이 설립시기를 오해하고 있다. 둘째는 계림장업단의 임무와 설립목적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이 보인다. 셋째는 인용한 논거의 해석적 오류이다. 첫째 + 셋째의 지적은 같이 연관시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도진순은 "동경 소재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의 자료에 의하면 쓰찌다는 계림장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확언한다. 그런데 그 근거를 ③번 밑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계림장업단이 일본 제국주의의 끄나풀이었다는 식의 복선을 깔아준 후 "1896년 치하포사건 직후 평양 지역에 일본 행상인은 총 73명이었는데, 모두 계림장업단 단원이었다"  따라서 쓰치다도 그 단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추리를 한 것이다. 결국 김구가 죽인 쓰치다는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도진순이 인용한 위 자료는 표지와는 달리 1896년 6월 29일에 작성된 자료이다. 도진순은 치하포사건 발생 직후라 설명하고 있지만 6월말과 3월초는 시간적으로 매우 많은 차이가 난다. 계림장업단은 조선 내지에 진출한 일본 행상인들의 상권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1896년 4월 29일 福井三郞 등 48명이 인천에서 최초로 조직한 단체이다. (註: 4월 29일은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날이며, 정식출범은 5월 17일이다. 출범일 당시 단원은 219명)

이 단체가 37명의 단원으로 평양에 제1대구(大區)를 조직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인 1896년 5월 22일이었다. 따라서, 쓰치다가 살해된 1896년 3월 8일은 평양에 계림장업단이란 조직이 있지도 않은 때였다. 3월 8일이면, 일본 행상인들이 본국의 훈령을 받고 인천으로 한참 철수 중이었을 때다. 쓰치다 역시 조선인 복장으로 변장하고 철수를 하다가 황해도의 한 여관에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도진순은 계림장업단의 설립 목적이 ①일본 상인들의 자위(自衛)를 도모하고 상권(商權) 확대와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를 모집하는 조직이었다라고 하지만, 이는 바른 설명이 아니다. 계림장업단의 설립목적과 임무는 시기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도진순이 좀 오버한 게 아닌가 싶다.

계림장업단이 수집한 정보는 군사관련 정보가 아니라, 상황(商況) 및 민정(民情)과 관련된 정보다. 게다가 이런 정보수집 임무는 1897년에 이 단체가 일본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관변화될 무렵에 부여받은 것이므로, 초기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

계림장업단은 단체의 위세와 규모가 커지면서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에서 보내주는 보조금에 연연하다가, 정치색을 띤다는 이유로 1898년 3월부로 보조금이 중단되면서 해체위기에 직면한다. 계림장업단의 필요 이상의 오버질에 넌더리가 난 일본 영사 및 공사들이 일본 정부에 비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加藤增雄  일본공사는 "종래의 경험에 의하면, 日·韓人간의 갈등은 십중팔구 日人의 도발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該團(계림장업단)의 조직 중 자위 혹은 방어 등의 핑계로 거기에 일종의 의미를 함축시키려는 것은 오로지 團의 성립상 필요없을 뿐 아니라 외교상으로 매우 불온한 혐오감이 있으므로 이들의 형적을 제거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하면서 계림장업단의 활동범위를 매우 축소시키는 방안을 건의하였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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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안무 2009.01.02 0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범일지에는 일본인의 생피를 마신 협기행각을 기술해 놓았습니다만 다행히 문초기록을 보니 그런 내용은 없더군요. (........)

    문초 내용을 보면 결국 좋게 말해 객기에 맘에 안드는 외국인을 죽인 살해행각 - 이건 김구가 후에 독립운동에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미화할 수 없는 범죄행위겠지요.

    • 眞明行 2009.01.02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기억으로는 생피를 마신게 아니라, 쓰치다를 살해한 후 낭자한 피를 얼굴에다 쓰윽 묻히고, 투숙객들을 상대로 누가 나한테 까부냐? 일갈을 내치는 바람에 다들 쫄아서 벌벌 떨었다는군요. 김구의 치하포사건은 의거라기 보다는 실수에 가까웠습니다. 찬양할 일과 잘못된 일은 구분해야하죠.

      막무가내로 미화하는 분들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 티안무 2009.01.02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린이를 위한 백범일지'에는 그 인혈을 마시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더군요 -ㅅ-;;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된 땅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셨다.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구절을 얘들 보라고 집어넣는 놈들은 도대체가 뭔 정신인지 -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knu=03030244&menu=cview&encrt=zMv92a150wbTmAzYMDI0NCZzZWNzdWJudW09MTE=&query=%B1%E8%B1%B8%20%C7%C7%B8%A6%20%B8%B6%BC%CC%B4%D9#middle_tab

  2. 천지화랑 2009.01.02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백범일지 읽으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긴 했죠. 대체 일본육군 중위가 그 동네에는 왜 갔을까. -_-;;

    • 眞明行 2009.01.02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육군중위설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죠. 첩자나 밀정은 대부분 언제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말단이나 하위직급을 쓰는 것이 일반 통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말이 안되는 점이 많습니다.

  3. 한단인 2009.01.02 0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림장업단의 필요 이상의 오버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군요. 공사들이 넌더리를 낼 정도의 오바라..뭔 짓을 했길래..?

  4. 천지화랑 2009.01.02 0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이오공감 올라갔는데 이번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런지 궁금해지는군요. 쩌업. -_-;;

  5. Esperos 2009.01.02 0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번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전에 어떤 무리가 했듯이 모든 게시물을 반대하기를 해 보고 싶어지는군요. 그러다가 제가 이글루에서 짤리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요.

    • 眞明行 2009.01.02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 단, 이글루스 운영진에게 정식으로 건의를 하거나 본사를 방문하여 취지를 설명해볼까 합니다.

  6. 반동분자 2009.01.02 0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친필본 그게 궁금해지는 군요... 저도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일반인들에게는 성역입니다.. 심지어 해방후의 행적까지도 성역이 되어 버렸습니다...항일 운동에 대한 정신과 업적은 존경하지만 모든것이 옳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이글이 폄하의 수단이 될거라고 생각해서 적극적 옹호론으로 변질시켜서 너희들은 친일이다라는 딱지가 날라올것으로 예상되는 포스팅 입니다.......-_-;;

    • 眞明行 2009.01.02 1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보주의자들도 해방 후 김구의 테러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분들은 많더군요. 물론 그런다고 이승만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요즘 젊은 세대들의 무비판적인 추종은 눈에 거슬리는 점이 많습니다.

  7. 제갈교 2009.01.02 08: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까 이오공감에 올라간 것이 보였는데 지금은 내려갔네요. ;;;

    그나저나 아무리 그 나라 안에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인데, 저런 면에 일부러 정당성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을텐데요. -_-;;

    • 眞明行 2009.01.02 1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이오공감은 어차피 기대도 안했습니다. ^^

      2. 당연하지요. 위인을 위인시 하는 역사서술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8. 타누키 2009.01.02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론이 기대됩니다만 보긴 힘들겠죠...ㅡㅡ;;

  9. 천지화랑 2009.01.02 1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오오 아직도 역사밸리에서 살아있습니다!

  10. 반동분자 2009.01.02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의사 아들인 안준생이 변절했다고 하여 암살하려고 했고 백범일지에도 쓰여 있다고 하는데 만약 확실한 증거 없이 살인을 하려고 했다면 백범 김구선생의 한계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안준생이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다녔는지 고증이 필요할듯 합니다....

  11. 미친과학자 2009.01.02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쩝, 김구가 젊은 시절 혈기를 못이겨 일본인을 살해한 사실이 김구의 항일활동 전체를 깎아내리지는 않는다고 봅니다만, 저렇게까지 역사적 팩트를 무시하고 싶은것인지...

    그냥 무리한 신격화 열폭으로 자살골 넣는것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듯.

  12. 우왕구우웃 2009.01.03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츠메같은 10세키랑 안놀면 안되나열?

  13. 위서가 2009.01.03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이 되신다면 안익태와 애국가 문제를 한번 다뤄보시길.

    나츠메님 블로그에 별 같잖은 것들이 와서 댓글을 단 것을 보니 웃겼는데,
    그 중 애국가 예가 가장 인상적이었거든요.

  14. 2009.01.04 0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백범 2011.04.2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없는 딴소리 같겠지만, 김완섭이 억울하다는 증거가 나왔네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1135&EVEC

    이 기사에는 지금

    "2004년 7월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당시 정현태 검사는 김씨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130032911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13&officeId=00032&pageNo=19&printNo=16186&publishType=00010&doNotReadAnyMore=notClose

    "도 교수는 1895년 백범이 살해한 왜인 쓰치다(토전양량)의 직위를 중위로 기록한 것을 '백범일지'의 대표적 오류로 들었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쓰치다는 일본 계림장업단 소속의 상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도진순 교수가 찾아낸 자료만 보면 김완섭은 거짓말을 한게 아닌데...

  16. 그게 2011.06.16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거 그냥 강도 살인입니다.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0922u00_02.pdf

    구월 십륙일 인천 감리 리지정씨가 법부에 보고 하였는디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수 토전양량을 때려죽여 강물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 많이 뺏었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올리니 죠를 재판하여 달나고 하였더라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code=DLD&year=1896&month=11&day=07 당시 기사 지면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1107u00_02.pdf

    "그전 인천 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자칭 좌통령이라 하고 일상(일본상인) 토전양량(스치다 조료)를 때려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탈취한 죄로 교(교수형)에 차기로 하고"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002.000.000.000&lm_sSrchYear=&keyword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17. 그게 2011.06.16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his_code=PV_DJ&book_code=A011&item_code=005.002.000.000&keyword=&rid=005.002.000.000

    판결
    황해도 신천군 두나일소면(斗羅一所面) 청계동(淸溪洞) 1통 4호
    농업 해주읍 출생
    강도 및 강도미수
    안명근(安明根) 33세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금전 대출업 황해도 신천군 읍내면 사리(四里) 18통 9호 출생
    강도 배경진(裵敬鎭) 27세


    로 시작합니다.

    안악사건도 강도사건입니다. 안명근이 있었는데,김구도 그때 당시 참가했습니다. <강도미수 보안법 위반
    김구(金龜) 36세>라고 나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