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2012.01.09 00:36
5. 문○○ 할머니의 증언

문○○ 할머니는 1992년 시모노세키 우체국을 상대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을 제기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자신이 위안부로 근무했던 부대명, 도중에 머물렀던 여관의 상호이나 지명, 친척집 가게의 주소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만큼 영리하신 분이라 증언 내용도 구체적이고 상당히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이 분 역시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가감되거나 상이한 면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문할머니는 최초 정신대 피해 신고 당시에는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살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가기만 하면 일자리도 좋고 돈도 잘 번다』는 말에 속아 42년 7월부터 해방후인 46년4월까지 약 3년6개월여 동안「후미하라 요시코(文原吉子)」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따라 버마·태국 아유타야 등으로 끌려다니며 위안부 생활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1991-12-07자 참조)"
문할머니가 언급한 "안면이 있는 남자"는 다른 자료를 보면 마쯔모도라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宋씨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초의 신고가 있고 나서 1년 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서는 느닷없이 1940년에 일본헌병에게 강제연행되어 중국 동북부 도안성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얘기가 추가되고 있다. 즉, 이 증언대로라면 문할머니는 1940년, 1942년모두 2차례에 걸쳐 위안부를 경험한 셈이다.

문할머니는 이에 대해 정대협 증언집 말미에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991년 최초 신고 당시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빼먹었는데, 그때는 부끄러운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남방(=버마)에 갔던 일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숫한 시기에 채록된『<証言>從軍慰安婦-女子勤勞挺身隊 / 伊藤孝司 著 / 1992』에는 중국 도안성에서 위안부 경험이야기는 빠져있다. 인터뷰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뒤에 나온『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 George Hicks / 1995』에서도 마찬가지다.

1992년 일본 법원에 제소된『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소송 법정증언』이나『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에서도 중국 도안성에서의 위안부 얘기는 없었다. 오직 정대협을 거치면서 일본헌병에 의한 강제연행 얘기가 추가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헌병의 등장이 전체의 증언 시놉시스를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을까?

정대협著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실린 문할머니의 강제연행 당시의 증언을 본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내 또래의 다른 여자애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본군복을 입은 남자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우리를 력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기차이름은 아카쯔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내리면서 안동이나 봉천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 중국에 와서는 처음에 우리랑 같이 오던 남자는 어디론가 가고 그 후에는 중국말을 하는 남자가 우리와 내내 같이 갔다. .....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중국 동북부 도안성이라는 곳에 내렸다."
고찰1) 일본헌병은 빨간 완장을 차지 않는다. 흰색 완장이다. 완장의 글씨가 빨간색일 뿐이다.
고찰2) 아카쯔키는 경성(서울)이 종착지다. 그리고 조선에서 도안성까지 가는 열차편은 없다.
고찰3)『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일본인 헌병외에 조선인 헌병과 형사 3명에게 연행되고 있음. 갑자기 가해자 숫자가 불어나고 있다. 또한 역전에서 자신을 인수한 사람이 증언에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로 되어 있는데, 『버마전선..』에서는 이들이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형사로 둔갑해 있다.

할머니의 증언 내용이 자료마다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註) 출전 서지사항
① 정신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울, 1993년
② 버마전선 위안부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아름다운 사람들, 2005년
③ 일본군대의 성노예 :『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 George Hicks, 창작과 비평, 1995년
④ <証言>從軍慰安婦 :『종군위안부 : 남북 종군위안부 27인의 증언』, 이토 다카시, 눈빛, 1997년


자료1) 1940년 문할머니가 일본헌병에게 납치되어 헌병대로 이송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친구 하루코네 집이 화장터였으므로 납치가 자행된 이곳은 현재 대구광역시 남산4동의 남산초등학교 부근임. 당시는 시내에서 상당히 벗어난 외곽지대였는데 헌병대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대구지방 병무청 자리이므로 1934년도 大邱府全圖를 참조하면 대략 저런 납치경로를 추정해볼 수 있는바, 동선은 약 3.4km이고 이동시간은 성인기준 도보 40분~50분 정도의 거리임.

문제는 해질녘 오후 6시쯤 헌병이 대체 무슨 용무로 헌병대에서 도보 4~50분이나 떨어진 시외곽지역을 배회하다 우연히 발견된 소녀를 무슨 죄목으로 헌병대로 끌고 갔냐하는 것이며, 헌병대 안에는 이미 납치(?)된 또다른 소녀를 구금하고 있었다는데, 시골의 헌병분견소도 아니고 헌병대본부에서 어떻게 이런 인신매매를 태연히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불능하다.


자료2) 아카쯔키 급행열차 운행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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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부산발 급행열차 시간표 (1941년 조선열차시각표 참조하여 엑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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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 증언집에서는 아카쯔키 급행을 타고 대구에서 곧바로 중국 도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위 열차시각표에서 보듯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에서는 신의주에서 환승하여 중국 동안성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의주는 환승역이 아니고 아카쯔키는 신의주까지 가지 않음


자료4) 문할머니의 전시우편 저금원부에 불입된 입금 내역 (이자를 제외한 원금불입)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츠모토는 우리들이 준 표를 받기만 하고 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그리고 화장품 같은 것을 조금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우리들은 일치단결해서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내가 리더가 되어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마츠모토와 교섭을 했다. 그렇게 실력행사를 할 때만 마츠모토는 돈을 아주 조금, 1원이나 2원쯤 주곤 했다. 그래도 나는 조금씩 받은 팁을 모아 큰 돈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나만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다가는 안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무를 보는 군인에게 나도 저금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 모리카와 마치코, 91p~92p
상기 증언을 살피건대 문할머니는 위안부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이 아니라 팁을 모아 저금을 했다고 한다. 입금일자를 보면 최초 입금일인 1943년 3월 6일 500원을 입금한 뒤로 불과 4개월만에 700원을 또 입금했다. 군인들 봉급이 전지증봉을 감안해도 월 30엔이 되지 않고 장교의 경우 150엔 미만인데 팁을 대체 얼마나 받아야 월 175엔 이상의 팁을 모을 수가 있는지 미스테리한 일이다.

일본 법원에 제소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판결문을 보면 "매일 저녁 수입한 군표를 문옥주 등은 마츠모토에 건네고 한달에 1번 그 반액을 현금으로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위의 책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반된다. 어느쪽이 맞을지는 돌아가신 그 분만이 아실 일이다.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이런 초보적인 검증을 살피지 않은 정대협과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밖에...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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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nowski 2012.01.09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점점 더 아스트랄해지네요....

  2. 강희대제 2012.01.10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참 치밀하시군요..;; 3~4일만에 내놓는 포스트신데 어디서 저런자료를 다 구비하신건지..;;

  3. 무애자 2012.01.10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 모 할머니의 경우 "군표를 받아 당시 돈 1만여원을 저금했지만 버마에서 통장을 분실했다"

    " 술취해 들어온 일본 군인이 칼을 빼들고 행패를 부리자 그 칼로 일군을 죽였다가 군종재판에 회부되기도 했고 그 직후 일주일만에 다시 위안부생활을 되풀이해야하는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고 하더군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521245

    • MAUS.K 2012.01.11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버마전선..』저서를 보면 통장은 버마에서 분실한게 아니라 핸드백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예금청구권의 실효로 오인하여 정당히 요구할 수 있는 기간을 놓쳤다고 되어있습니다. 말이 또 달라지는군요.

      군종재판 회부건은 그 팩트 여부를 좀더 확인해봐야겠죠. 『버마전선..』에 당시 상황이 기술되고 있는데, 일본의 전시 사법제를 고찰해보면 할머니의 증언에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다 다루려면 제가 책을 써야 하려나요?

  4. 지나가다 2012.01.15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심각하군요. 이렇게 엉성한 자료를 가지고 일본에 소위 클레임을 제기하려고 했단 말이죠? 제가 일본이라고 해도 도망다니겠습니다. 한국 학계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상태에서는 일본이 위안부 책임 없다고 발뺌해도 할 말도 별로 없고, 또 우리 입장에서도 위안부 문제의 진상 파악이 안되고 공상소설만 쌓여갈 수 밖에 없는데 말이죠. 이명박 이번에 일본 가서 제안 괜찮게 던지고도 별 성과 없이 돌아온 게 다 이유가 있겠군요.

    이 상태라면 매주 할머니들 데모장에 데리고 오는 단체들 제정신이 아니군요.

    • 나츠메 2012.01.21 0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1. "한국 학계는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귀하께서 이미 답을 알고 계십니다. 한국 사학계는 역사학을 가장한 "공상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2. "매주 할머니들 데모장에 데리고 오는 단체들 제정신이 아니군요."

      제정신이 아니죠.

      위안부 피해자들을 거리로 동원하는, Nationalism에 입각한 일제의 전시동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위를 시전하는 것이 바로 <정대협>이란 시민단체입니다.

      그들은 "민족"이란 이름의 <동원령>을 통해 피해자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재현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통해 다시 민족적 내러티브를 강화하여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있지요.

      이미 식민지 시대 종결 후 60여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피해자들에게 식민지 시대의 위안부이길 강요하고, 그 끔찍한 치부를 끊임없이 노출시켜 다른 시민들에게 각인하는 정대협이야말로 민족의 '포주'이고, 피해자들은 '21세기판 위안부'라 할 수 있음.

      이처럼 20세기에 '성적 도구'로 이용된 위안부들을, 21세기에 새롭게 '민족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저 쓰레기 같은 <정대협>입니다.

    • 과객 2012.01.25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감성, 정서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안부 할머니들 동원하면 기자들은 감성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기사 쓰고. 그럼 문제의 본질 같은것은 안보고 그냥 일본 나빠요 만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할머니들 춥거나 아파서 못간다고 하는 것도 강제로 동원하는 인간들도 있다 합니다. 듣기론 거의 반 협박조라 하더군요.

      위안부할머니들을 팔아넘긴 조선인 포주나 직업소개소도 나쁜인간들이지만 지금와서 할머니들을 또 이용해먹는 정치꾼들은 더나쁜 인간들입니다.

      노인분들 아픔을 두번 세번 기억해서 더 아프게 만들고 그걸로 표얻을 생각이나 하는 양아치들이죠.

  5. 정말 2012.01.24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제는 일당주고 데모시키는 놈들이 문제입니다
    위안부를 팔아서 정치적 이익을 취할려는 양아치 정치인들이 없어져야
    실체적인 진실과 사실을 직시할수가 있다고 봅니다

  6. 2012.01.2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2012.02.08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8. 맑은강물 2012.02.09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군위안부 문제의 이면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니 충격이군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종군위안부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과객 2012.02.19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65년 이후로도 한국은 일본 정부로부터 이런 저런 이유로 배상하지 않는 명목으로 자금을 받아갔습니다. 98년부터는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쌀과 곡식, 가전제품 같은 물자를 받아갔고요.

      분명 65년의 조약으로 계약이 끝난 것인데도 한국에서 징징대기에 어쩔수 없이 일본이나 일본 정부가 인도적으로 지원은 해주었습니다만, 계속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이 비양심적으로 행동한다면 일본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앉아 있을까요?

      더구나 일본내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이 일본극우,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욕까지 먹어가면서 아시아여성기금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치료, 진료, 생계지원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것을 거절한 것은 한국의 여성단체였습니다.

    • 검둥개 2012.12.09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객/

      표현이 왜 그러십니까? 징징대다뇨?
      자국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말씀하시는 논리는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흡사 일본인이 일본 입장에서 써 놓은 말 같네요.

      혹시 일본분이시라면 지레 한국분이라 생각한
      제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국적이든 위안부 문제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스스로 지식인이라 생각한다면 말을 함에 있어
      한번 더 생각 하시시는 것이 스스로 얼굴에 침을
      덜 뱉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9. 행인1 2012.07.05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정대협이 불쌍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동원해서 얻으려는 이익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10. 미카엘 2012.12.26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대구 사람인데요 지금의 대구 남산초등학교에서 병무청까지 3.4km차로 가면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요
    배회하다 납치 한것이 아니라 헌병대 차량으로 납치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요?

    물론 대부분의 종군위안부는 납치보다는 취업사기를 통한 것으로 봅니다

  11. 미카엘 2012.12.27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걸어서도 충분합니다
    남산초등학교는 남산4동이 아니라 남산2동이며
    3.4km가 아니라 병무청까지 1.64km 입니다

    보통 천천히 걸으면20분이상 걸리며
    빨리걸으면 15분도 가능합니다

    택시를 타더라도 2400원기본요금만 받습니다
    제가 남산초등학교에서 매일신문사 부근 계산성당은 직접 걸어가본적있는데
    매일신문사에서 조금떨어진곳이 병무청입니다
    지금현재 교통신호등을 포함하여 이렇지만 일제당시에는 도보기준으로 더빨리 갈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네이버에서 거리를 검색해보았습니다
    총거리 1.64km예상시간 25분 나옵니다

    • 眞明行 2012.12.28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을 잘 읽으시라고 누차 말씀드립니다. 현대지도가 아니라 고지도를 꺼내놓고 설명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당시는 저 길이 요즘처럼 잘 닦여진 신작로가 아니라 꾸불꾸불한 산길이었습니다. 저 지도는 캐드를 이용하여 거리를 측정한 결과 3.4km 정도로 계산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남산4동이라 함은 남산초등학교를 얘기한 것이 아니라 남산초등학교 건너편의 화장터가 남산4동이란 뜻입니다. 해질녘에 시외곽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곳에서 여자 아이 하나 잡자고 헌병대에서 출동했다는 얘기를 믿으라는 얘깁니까? 지금?

      화장터 인근인 대명동 화엄사에서 중구 포정동 병무청입구까지 현대지도하에 최단 거리 검색하면 2.64km고, 큰길로 가면 3.11km 나오는거 다 확인했습니다. 자꾸 이런 지엽적인 걸로 시비가 붙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12. segi 2016.01.26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독증 환자들이 너무 많군요....ㅋㄷ
    이런글에 답글을 달기위해서는
    비동기적인 문답 같은 답글 퀘스트를 두어야 할 듯....

  13. segi 2016.01.26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독증 환자들이 너무 많군요....ㅋㄷ
    이런글에 답글을 달기위해서는
    비동기적인 문답 같은 답글 퀘스트를 두어야 할 듯....

  14. 레닝 2016.02.01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혹시"일본 법원에 제소된「전시 우체국 저금 환불 소송」판결문"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님이 언급하신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인용은 많이 돼있는데 일본 사이트를 다 뒤져도
    관련된 출처를 알수가 없네요.

    구글링하다보니 일본인들끼리도 출처에대해 설왕설래하던데.. 혹시 확인되는 자료가 있으면 답글부탁드리겠습니다.

    • 眞明行 2016.02.0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판결문이 아니고 소송장의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인용문의 출처를 따로 기록해놓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실제로 저런 재판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우체국에 환불을 청구했다는 얘기있고, 반환소송을 추진하겠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소송까지 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옥주가 실제로 소송에 참여한 것은 김학순이 1991년 12월에 동경지법에 제기한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의 일원으로 포함된것만 확인되었습니다. 아마도 저 소송장 내용이 맞다면 김학순이 동경지법에 낸 소송에서 증언자로 참여한 내용일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추서를 할 기회가 온다면, 다시 자료를 보강할 생각이고, 일부분의 오류나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근.현.대.사 2011.12.27 00:46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가 1902년 7월부터 2개월간 경주, 개성, 서울 및 그 주변을 조사하여 1904년에 작성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따르면 당시 불국사는 대웅전, 다보탑, 석가탑, 자하문, 극락전, 범영루와 무설전이 남아 있었고, 자하문과 범영루 사이에는 회랑도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의 대 석축이나 청운교, 백운교 등은 모두 허물어져 있어 그 보존상태가 심각하였다. 수리전의 광경을 보면 '석단의 동쪽 가장자리는 파묻혀서 경사면을 이루었고, 서측의 석루 같은 것은 완전히 흙속에 묻혀서 석단다움이 사라지고 돌계단은 비틀어졌으며, 돌난간은 쓰러져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1905년경 자하문에 연결된 회랑마저 붕괴되고 1910년경에는 무설전이 붕괴되면서 총독부는 불국사 정비를 실시한다. 불국사의 정비는 1919년부터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수리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1925년까지 불국사 주지에게 지급되었다. 1934년과 1935년에도 추가 보수공사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수학여행때마다 우루루 몰려가서 사진을 찍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랍시고 자랑스러워 하는 불국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당시 불국사 주지가 불교개혁이니 내선교류니 심전(心田)개발이니 일제정책에 적극협력한 댓가로 얻어낸 산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1. 일제에 합방된 직후 불국사 전경 (1914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일제의 보수공사 이후 불국사 전경(1925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오늘날과 같은 불국사의 장엄한 위용은 일제시대에 그 원형이 마련된 것으로, 소위 잘나신 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전통이 무너지고 왜색풍이 가미되었다든지, 실측도의 원형을 무시한 졸속복원이었다든지 말들이 많다. 자기 나라 문화재를 저렇게 폐허로 방치하고 남의 손에 의해 보수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껴야 순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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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眞明行
TAG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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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빠 2011.12.27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활발한 포스팅 감사합니다.

    불국사 하니 패션진보들의 천사병이 떠오르네요.. 광화문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밥먹여줘라, 4대강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난방해줘라, 스키점프대회 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목욕시켜줘라... 정작 저런 문화유산이나 상징적 건축물로 인해 생겨나는 외부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이죠. 그렇게 따지면 불국사야 말로 민중을 수탈하고 백성들을 굶겨죽이면서 만든 전시행정일텐데 말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그렇게 떠받치는 것들이 일제의 잔재요 (그분들 말에 의하면),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것들이 한민족의 거지근성이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백범 2012.01.05 2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광화문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밥먹여줘라, 4대강 공사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난방해줘라, 스키점프대회 할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목욕시켜줘라..."

      참 핑계들은 좋지요.

      그덕에 서울시내에 상류층 학생들은 일부러 집에서 따로 영양간식이란걸 싸갖고 다니거나 배달하는 것(다 학교로 반입 가능합니다.)이며, 어느정도 되는 애들은 급식 안먹고 매점 달려가거나 월담하는 것을 저들은 모르나 봅니다.

      그리고 중학생, 고교생만 되면 그 유명한 노스페이스의 질로 빈부를 가르고 있거늘...

      현실감각없이 망상과 몽상에 빠진 먹물들이 사회를 잘못된 곳으로 오도하고 있지요. 이건 뭐 국가와 국민만 오도하는게 아니라 헛돈까지 낭비하고 앉아있으니...

    • 진빠 2012.01.28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초등학교를 전교생 100명 남칫 안되는 어촌에서 2년정도 다닌 적 있었는데, 여기 학교 급식이 말그대로 무료급식이었습니다.

      반찬은 5일에 2번꼴로 오징어국에(어촌은 일년내내 오징어를 말리죠 ㅡㅡ) 3번꼴로 베트남쌀과 찹쌀을 섞은 김주먹밥이 나왔습니다. 밥을 나기면 식판을 들고 벌을 서야 했기 때문에, 급식시간 5분 전에는 맨날 "하느님 오징어국이 나오지 않게 해주세요"하면서 '성부성자'를 하느라 가슴팍에 十자를 그리곤했습니다. 도시에서 전학온 어떤 애는 일부러 바닥에 국물을 쏟아 버리기도 햇는데, 지금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네요 ㅋㅋㅋㅋㅋㅋ

  2. 강희대제 2011.12.28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3. 드가모프 2011.12.29 0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때마다 느끼지만 좋은 글이 참 많습니다. 주인장 형님의 블로그를 알게 된지 이제 1년이 좀 넘었는데 방명록이 따로없으니 여기에 감사인사를 남기고 갑니다. 연말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올 새해에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MAUS.K 2011.12.29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졸필을 읽어주시고 격려주시는데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드가모프님도 새해 만사형통하시기를

  4. 백범 2012.01.0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뭐... 불국사 복원도 일본놈들이 관광객들 끌어모으기 위해서 정비한 것이며, 조선인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을 것이다 (카더라) 소리가 나올테죠 뭐... 보나마나 뻔할듯.

  5. ㅋㅋㅋ 2012.01.07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읽었습니다.

    추신 : 강희대제도 여기왔네?ㅋㅋ

  6. 미1쳤네 친일파 2012.03.04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시대떄 불국사 관리해줬다고 미1쳤네 가만히 있던 석굴암은 왜 건드는데?
    습기 잘 안차던 석굴암 괜히 건들였다가 시멘트로 떔방해서 습기 차는게 관리 잘해준거냐?

    • ㅎㅎ 2012.03.04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이 화상아. 그럼 그대로 굴이 붕괴되도록 냅두냐?

      시멘트 외에 자연석에도 빗물이 계속 때리거나 침투하면 균열가는건 아냐?

    • 병신새끼 요깅네? 2012.04.19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쿠ㅋㅋㅋㅋ 그러시다면 그냥 불국사 없애버리지?ㅋㅋㅋ

    • 2012.07.04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불국사에 적용된 복원방식은 당시로선 최선의 복원방식이었다. 70년대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했을것 같은가? 콘크리트 복원의 한계가 지적된건 최근의 와서다. 그리고 탓할려면 조선왕조를 탓해라. 탈레반들마냥 자기네 유적하나 관리 못해놓고 이제와서 난리신가?

  7. 牙辛正烈 2012.07.15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국사는 그 크기가 원래는 어마어마한 거대한 크기인데.. 이씨조선 시대는 GDP가 500년 동안 0%인데 수리가 했겠나. 5~10%의 인간들만 잘~ 처먹고 잘~ 사는 시대인데 그리고 여성은 완전 노예수준으로 키리까이 뎃쁘리고,,,, 무위문약의 이씨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단군이래 최악의 시대다.

    그나마 일한병합이라도 해서 일한병합 시대 때문에 일반 국민이 36년 동안 잘먹고 학교다니고
    근대화가 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될 수 있었지 않았나.

    병합 36년 말기엔 전쟁 때문에 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많이 힘든 시기였는데.
    한국은 또 이 시기를 일본이 조선을 강정착취 했다며 비방한다.


근.현.대.사 2010.08.16 02:10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해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돌이켜보건대, 실망 그 자체이다. 일제가 관련 자료를 폐기한 탓에 연구의 한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연구자들의 결과론에 집착하는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1939년 국가총동원령이 발효된 이후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비록 강제성이 수반되었다고는 하나, 필요이상으로 과장되고 억지를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강제징용을 다루었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강제징용으로 보아야 할지, 피징용자 수는 어느 정도인지, 일본 내지인에 비해 얼마나 가혹했고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수탈했는지 구체적인 비교 데이터나 근거가 전혀없고 합의된 바도 없다.

박경식이란 사람은 강제징용이 아닌, 강제연행으로 이를 표현하며, 130만에서 150만명의 조선인이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하고 다니는 양반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학자들은 "강제동원"의 개념을 사용하여 피징용자 수를 40만에서 60만으로 잡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다 강제징용은 아니다. 시기별로 모집-관알선-징용의 단계를 거쳤지만, 그 강제성에 대해서는 함부로 속단할 일이 아니다. 특히, 모집과 관알선 방법을 주로 사용했던 1943년까지의 일본 공문서를 보면, 계약기간 중 일시 귀국자들을 허용하고 있었고, 모집 대상에 일정 자격을 두고 있는 점과 자유도항이 금지되었던 점, 신분이나 이름을 사칭하여 허위로 도항을 시도한 자들이 증가하자 이를 단속하려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강제성과는 상당히 이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1944년 국민징용령에 의거, 강제 징용을 시도했지만, 일제는 본토에서만큼 큰 재미를 못보았다. 강제징용 대상자들이 순순히 징용되어 끌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1944년 10월 16일~25일간 노무동원 위반자 일제단속 결과 공문을 보면, 국민징용령 위반자가 6,726명이고, 징용출두 불응자가 16,440명에 달하는 등 무려 23,166명이 일제의 정책에 따르지 않았다. (이때 잠적하여 수배된자는 7,874명이었다)

그렇다면, 징용되어 일본 내지로 송출된 노동자들은 순순히 끌려갔을까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홋가이도(北海道) 소재의 광산에서 보고한 이입조선노무자 수를 보면, 배를 타기도 전에 20%가 도주했고, 배에서 내리자 마자 20%가 도주하여, 실제로 광산까지 도착한 인원은 총할당수의 60%만 도착했다고 한다. 이 60%의 56%는 1년내에 도주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몇이나 남아서 개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겠는가?

요컨대 진정한 의미의 강제징용자 수는 상당히 부풀려졌거나 왜곡되어졌다고 보인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연 얼마나 수탈당하고 노예처럼 살았겠냐 하는 점이다. 일단, 시기적으로 자유도항이 허용되었던 1938년 이전과 1939년 이후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1938년 이전의 자유도항은 조선에서의 취로와 생계가 곤란해지자,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생활을 영위했던 경우인데, 소화 9년도의 일본 자료를 보면, 이들의 평균 월수입은 15엔 이하 25%, 30엔 이하 44%, 50엔 이하 23%, 50엔 이상 0.07%였다.

소화 9년도에 전체 조선인 노동자 수는 20,304명이었는데, 이중 1,738명(8.5%)이 실업자였고, 반실업상태자까지 합하면 15,000명 수준이었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범죄율도 높았는데, 전체 노동자의 15%인 3,080명이 범죄를 저질렀고 이 중 54%가 절도죄, 30%가 도박죄였다.

그렇다면, 소화16년(1941년) 형사월보에 나온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어떠한가. 최초 이입후 6개월의 연수기간 동안은 일급 2엔에서 2엔 50전정도의 급여를 받고, 사업장에 배치된 이후에는 탄광의 경우 일급 3엔정도를 평균적으로 받았다. 이들의 월수입에서 평균 40엔정도는 본적지로 송금을 하고, 평균 15엔 정도는 저금을 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여기에 본인의 생활비 정도를 추가적으로 감안했을 때 이들의 월수입은 70엔~80엔 내외로 보여진다.

자발적으로 도항했던 소화 9년도 조선인 노동자들 중 월 50엔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자는 전체 조선인의 0.07% 밖에 안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강제연행(?)을 당했기 때문에 특별히 노예같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이라 해야 맞을까? 시대별 비교가 아닌, 일본인 노동자들과의 임금수준을 비교해도 문제다.

당시 조선인 근로자는 일본인 임금의 2/3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학자들은 민족차별의 증거라고 단언한다. 생각해보자. 조선에서 근로자를 모집하여(또는 관알선이든 간에) 일본의 사업장으로 이송한 후, 연수까지 다 시키고 현업에 배치하기까지 그 기업이 들어간 돈이 얼마일까?

당시 석탄통제회의 계산에 따르면, 징용에 대한 제 비용을 관납(官納)하는데 100엔, 부산이나 여수 등지에서 탄광소재지까지 여비 30엔, 숙박료 및 식비 10엔, 입산(入山) 당시 준비비 70엔, 기초훈련기간 중의 임금 50엔, 후생시설비 20엔, 기타 20엔 합계 300엔이 들어간다. 여기에 도주자가 발생하면 추가로 270엔의 비용이 또 소요된다고 한다.

거기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작업능률이나 생산성이 일본인의 60%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인 근로자가 지급받는 임금이 일본인에 비해 차별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조선인 근로자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은 정도의 혹독한 노예같은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당히 태업과 스트라이크 등으로 일본인 사용자와 정부에 맞섰고, 협화회에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건의할 정도의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 일본 당국은 사업장 내에서 임의의 사형(私刑)이나 체벌을 단속토록 했고, 민족적 감정으로 조선인들과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일본인 근로자들의 언행을 유념시켰다.

또한 사업장 별로 임금과 근로조건이 천차만별인 점을 감안 공정임금제를 준수토록하고, 휴일수당 등을 지급하도록 사업주에게 권려토록 했다는 공문서도 보인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지켜졌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며, 아무 근거도 없이 일본이 특별히 조선인 근로자만을 착취하고 노동력을 수탈한 것처럼 넘겨짚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일제시대를 공부하면서 수탈과 압제가 전부인 것처럼, 또 그게 정의이고 민족적 감정에 부응하는 것처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고민해 봐야한다. 비록 타자에 의해 근대성이 이식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수치스럽게 느낄 필요는 없다. 포스트 식민주의와 주변부 이론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아가고 있을 때 아직도 우리는 근대가 없는 역사적 단절을 당연시 하며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眞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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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rchDuke 2010.08.16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문이 있는데, 왜 1년내에 거의 90%나 되는 인원이 도주했는가에 대한 원인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넘어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도주했다더라도 국가가 강제적으로 그만큼 인원을 끌고간 것 자체가 문제의 여지가 되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 하신 분이 있다 시피, 위에서 삥땅치거나 실제로는 지급이 안된 사례가 있으며 그 경우에 현재 진행된 소송이 있다고 합니다.(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6/h2010061722233621950.htm)
    그렇다면 대부분이 고임금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가 문제가 됩니다.

    여튼 가장 큰 의문이. 그렇게 대우가 좋았다면 도착한 인원마저도 왜 대부분이 도주했을까요. 그것에 대한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백범 2010.08.16 1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자기가 좋아서 가거나, 먹고 살려고 자원해서 간 사람들도 '끌려간' 사람들이고 일방적 피해자들이란 말인지??? 현하의 역사교육은 그렇게 다 뭉뜽그리려고 하고, 또 그렇게 해야 된다 라고 세뇌 내지는 강요를 하는군요.

  3. 少雪緣 2010.08.16 16: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어떤 형태로 징용되어갔든 노동의 강도가 높아져 갔고 대우는 열악해 질 수 밖에 없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옴에 따라 고용주들이 원활한 고용 사이클을 유지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징집되어간 기간 및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는 연속적으로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도입부나 결과물, 단편만을 가지고 전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4. 에드워디안 2010.08.16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민족주의적 사관에서 벗어나 일제시대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시도해야 할텐데, 이것을 '친일파' 운운하며 트집 잡는 인간들을 보면 한심할 따름입니다...

    • 백범 2010.08.16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건 원 객관적 평가조차 친일파로 싸잡아 욕해버리니, 그리고 그런 교육이 강요되어 오다 보니 누구도 쉽게 재조명할 엄두 조차 못내고 있는 현실이지요.

  5. 맥아더 2010.08.16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lamit85.egloos.com/5333948#5333948_1

    위에 타고 가서 보세요.

    제3의사나이는 증언집을 사악하게 편집해서 왜곡시킨 겁니다. (무명씨 글 따지는건 아니고, 댓글에서 언급되어서)

    강제 징용이 맞고 열악한 대우를 받은건 사실입니다.

    • 제3의사나이 2010.08.16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이가 없네요 ㅎㅎㅎ
      트집을 이런식으로 잡나요? 제가 쓴 글 제대로 읽어봤나요?
      제가 그 증언들 제시하기 전에 뭐라고 했는데요?



      "다음은 증언집에 나온 여러사람의 증언중
      내가 '의외라고 생각한 부분' 혹은 '놀란 부분'을 모아놓은 것이다."



      '의외라고 생각한 부분' 과 '놀란부분'을 모아놓은 거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지금와서 '자기 편한 부분만 편집했다??'

      힘들고 고생하고 배고프고 그런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습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배웠고...그렇게 생각했구요...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아닌 의외의 모습들이 있어서
      그런 부분을 모아놓았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왜 그런 부분만 모아놓았느냐!" 라니요??

      왜 제가 미리 밝힌 부분은 교묘히 빼면서 비난을 합니까? ㅎㅎㅎ

    • 마법시대 2010.08.16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긴건 그 포스팅이 징용은 강제가 아니었다는 어떤 사람의 증언에 대해 포스팅 하고 난후, 다른 증언들도 보니 별반 다르지 않더라... 라는 식의 보충 포스팅이었는데, 정작 그 증언들에는 강제징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거죠.
      그런데 그런 부분은 쏙 빼놓고 올린다음 다음 그걸 놀란부분이라고 한겁니다. ㅎㅎ

      강제 징용 아니었네 식으로 말해놓고는 정작 강제징용 당한 할아버지가 증언한 내용에서 강제징용 부분은 쏙 빼놓은 다음 노름한 얘기만 올려놓고 마치 노름한 사람들이 큰 죄라도 지은냥 주석을 달아놓은걸 보니 기도 안차더라구요.
      그런데 강제징용 당한 할아버지의 증언 중 어느부분이 <강제징용 아니었다는 증언과 별다를바 없네> 가 되는걸까요?

    • 마법시대 2010.08.16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나는 내가 썼던 포스팅의 '증언'(강제징용이 아니었다는 내용)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라면서 올린 내용중 하나가 이건데
      http://pds20.egloos.com/pds/201008/14/20/c0045420_4c66833cd6975.jpg


      정작 그 할아버지는...
      http://pds20.egloos.com/pds/201008/14/20/c0045420_4c6683478f31f.png

    • 제3의사나이 2010.08.16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쯧쯧...
      '삼성 라이온즈 주요득점 장면' 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한거 보고
      "왜 실점 장면은 쏙 빼놨느냐!" 라고 할 분일세...

    • 마법시대 2010.08.16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잉여팀 2점 : 잘난팀 10점으로 끝난 경기에서 잉여팀 2점 득점장면만 보여주고
      "이것이 우리가 꼴찌라고 놀리던 팀의 모습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꼴. ㅋㅋ

    • 제3의사나이 2010.08.16 2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이 되는 예를 좀 들던지 ㅎㅎㅎ

    • 마법시대 2010.08.16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가 할말을 대신해주네.
      '삼성 라이온즈 주요득점 장면'은 말이 되고? ㅋㅋㅋ

    • 통탄 2011.03.14 0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북해도 강제징용 증언자료집이라...

      출처확인도 없는 자료를 어떻게 사실근거한 자료라 인정할 수 있나? 또한 편집자의 입장/관점에 유리한 부분만 부분인용해서 전체의 요점과 관점을 완전 와해조작할 수 있는 점을 이용한 친일파 혹은 일본인 후예의 소행으로 밖에 안보인다.

      만약 일제가 한국인의 인권과 노동력의 가치를 보호/인정해줬다면, 스스로를 옹호/변론할 수 있는 이익이 될 수 있는 관련자료를 파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If so, 일본정부는 머리가 비었다 라고밖엔 해명안될듯.

      원글또한 원글님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문서를 제시해야 설득력이 있을듯. 요즘 사람들 바보 아닙니다. 아무리 역사왜곡, 일제강점시기 미화하려 노력해도, 일제시대를 겪은 사람들의 증언은 역사를 통해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죠. 일본에 불리한 모든 자료들이 파기/비밀보관되고, 생존한 증언자들의 증언 파급효과가 시간이 갈수록 흐지부지하게 된다 한들 What happened just doesn't go away. Even the memories of our ancestors from their experiences remain in our vein and DNA.

      익명성, 접근성, 파급성을 이용한 인터넷 propaganda에 속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를 바로 잡힌 인생관, 세계관, 지식으로 항상 재정비하고 거듭나야 한다. 50년 전의 일제강점시기의 모든 끔찍한 비인간적 만행들에 대해 여전히 해명/사죄/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연고로, 이렇게 죄없는 (?)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선조의 허물과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감히 바로잡을 수 있는 일본의 양심을 주님께 기도드린다. 우리가 바로잡힌 역사의식/사회의식/문제의식을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죄없는 후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 동북지방의 쓰나미로 인해 겪고 있을 민간인들의 쓰디쓴 고통에 마음이 아프고,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며, 그들의 빠른 정신적/영적/육적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6. sulzip 2010.08.16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41년이면 총독부가 조선어사용을 금지한지가 31년이 지난 시점인데 강제징용 노동자의 나이를 몇으로 잡고 계시기에 말이 통하지 않아 작업능률이 낮았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킹오파 2010.08.16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어 사용 금지는 1930년대 후반인걸로 아는데요? 바로 조선어 사용 금지를 한것은 아님..

    • Montcalm 2010.08.16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본적인 펙트부터 안드로메다인데 .. 무슨 주장을 ..;31년이라니 ? ...

    • 에드워디안 2010.08.16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일합방 시부터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무슨 책을 읽으셨는지...?

    • 海凡申九™ 2010.08.16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병합 -1910
      조선어의 연구 및 조선어 사용을 금지 -1938

    • 나츠메 2010.08.16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뇌충 조센징 납시오~~

    • 백범 2010.08.16 2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빨리 잡아도 1936년인데 무슨 31년이시오?

      일제도 초반에는 문화통치라고 해서, 1930년대 중반까지는 조선인민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 통탄 2011.03.14 0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어 사용금지는 언제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모든 한국어 사용을 (말, 교과서, 책) 전면 금지한것은 30년대 후반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 이전부터 학교 시스템을 단축 폐지한데다(1908), 한일합병 이후로 일본어 수업 의무화 주당 10시간 -> 주당 64시간 (1922), 학교, 공공장소에서의 한국말 사용 엄금 (외할머니 증언-순사들이 거리 곳곳에서 감시했다고 함.)과 같은 reality만 보더라도, 일본어습득 불가상황이 전혀 아니었음. 그렇기에, 일본어능력 저하로 작업능률/생산력이 떨어졌단건 어불성설.

      또한 높은 지적능력을 요하는 job들이 아니고 단순노동들이었을텐데 언어가 얼마나 큰 장애요인이라는 건지 원. 그럼 현대에도 있는 각국의 이주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들 하신다는 건지 원. 암튼, 근거도 없는 오류 투성이 원글땜에 어린 양들이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 골고루입니다.

      다만 이런 류의 글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한번 역사인식을 되짚어보고 고찰하게 하며, 진실을 탐구하려는 노력과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마우이.

  7. asianote 2010.08.16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명씨 님께 개인적으로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관동대지진때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일본인이 되고 싶었는데 되지 못하고 천황폐하께 테러를 한 이봉창 의사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 海凡申九™ 2010.08.16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국왕에게 천황폐하라고 하는 저의가 뭡니까?
      일본인이십니까?

    • asianote 2010.08.16 2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범신구 // 님의 말씀이 많네요. 텐노헤이카면 텐노헤이카고 일본국왕이면 일본국왕으로 칭해야지, 어찌 천황폐하라는 되먹지 못한 표현을 썼네요. 너그럽게 용서하시길.

    • 海凡申九™ 2010.08.16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텐노헤이카도 뭐하니깐 그냥 일본국왕한테 투척했다고 하세요

    • 공손연 2010.08.16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asianote님께 개인적으로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만보산사건때 조선내 중국인 학살사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같은 건수를 가지고 위안부사건마냥 한국에서 물고 늘어지지 않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 asianote 2010.08.16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범신구 // 님 말씀대로 일본국왕에게 투척했습니다.

      공손연 //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점은 식민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사람들이라고 해서 착한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뭐 님 말씀대로 만보산 사건 때 조선 사람들이 무고한 중국인은 해친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요. 이 이상은 제가 말씀드릴 수 없네요. 제 능력 밖이라서요. 어쨌든 공손연 님 덕분에 여러 사건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 공손연 2010.08.16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제는 asianote님처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그다지 착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거나 아예 그런것은 생각안하고 자기한테 유리한것 불리한것만 생각하고 대응하는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고 업신여기는데 윤리,도덕적인 관점을 이용한다는데에 있습니다. 저도 asianote님의 친절하고 솔직한 응대에 감사드립니다.

    • 백범 2010.08.16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왕에게 따끔한 눈깔사탕 선물한거 하나 갖고 되게 심각하게 떠드네... 거참...

    • 통탄 2011.03.14 0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짜고치는 고스톱

  8. 공손연 2010.08.16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그 시절의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사회수준을 보고서도 어떻게 식민지의 2등국민밖에 안되는 조선인들이 일본인하고 전부다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좋다고 긍정할수는 없더라도 민족차별운운하며 들이댈문제인지 순수학문적인 사고로 접근할 사고력조차 없는건지......

    도의적인 것하고 현실적인 것하고 구분도 못하는 작자들이 학자랍시고 교편을 잡고 대학생을 가르치니 대학생들이 가슴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뜨거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 無碍子 2010.08.16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인 로동자와 일본인 로동자의 대우에서 차별은 합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현하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로동자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최저임금 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고있습니다.
      민족차별보다는 생산성의 차이라는 관점으로 볼 수는 없겠는지요?

    • 공손연 2010.08.16 2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합당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차원에서의 현실성입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등 세계 어느나라를 가도 본국인과 식민지인들의 차별이 만연한데 일본한테 그 책임을 물을게 무엇입니까? 합당치 않더라도 일본을 지칭하고 지적할 이유나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외국인노동자가 한국인과 같은 직종의 같은수준의 노동을 하면서 똑같이 받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지적하신바가 무슨 의미인지 알수가 없네요.

    • 無碍子 2010.08.16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직접 급여 명세서를 보지는 않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안산공단이나 시화공단에는 한국인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 海凡申九™ 2010.08.16 2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몇 마디 뻘소리를 해보자면
      2등국민 얘기는 좀 그런 것 같고 단순히 생산성으로도 조금 뭐한 듯...

      뭐, 심정적인 의견에 불과한 뻘소리라고 봐도 좋음

    • 백범 2010.08.16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 킹오파 2010.08.17 0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인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더 준다?

      두가지로 볼수 있음.

      1. 한국인이 안 들어오려 해서 한국인이 거의 없고 남아있는 한국인도 생산성이 없을때

      2.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보다 일 잘하거나...

      어느 기업가가 정줄 나가서 언어 이해 능력 떨어지는 외국인 노동자를 한국인보다 더 주고 싶겠습니까?

      한국인 이상으로 주는 건 이유가 있어서 주는 거지효.

  9. 백범 2010.08.17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보니 참 이해안되는 화상바가지들 참 많다. 나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도 강제징용의 피해자들인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분명 나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외국으로 떠난 그런 사람들도 존재했다 라는 '사실'을 말하는게 그렇게도 죽일 죄인지???

  10. 2010.08.17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주코프 2010.08.17 1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상도 촌구석의 9형제의 맏이로 태어난 '신격호'란 인물을 떠올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빈곤한 소작농 집안에서 '농사나 지어서 형제들 책임져라'는 부모의 말에 반발, 단신 도일해서 일본인 경영 두부공장에서 열심히 배달해 일명 '신격호 두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일본인에게 신뢰를 받습니다..

    이후 두부공장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그 자본으로 태평양 전쟁시기에는 '군납유류품'제조업회사'의 사장에 올라 자본을 키웠다가 미군폭격으로 손해를 보지요..

    전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잔류 한국전쟁시기 미군에 "과자, 껌"등을 납품하다 신뢰를 얻고, 그 연줄로 현재의 코리아타운으로 알려진 도쿄의 '신오오쿠보'에 굴지의 '껌공장'(현재도 신오오쿠보 경제의 40프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을 세워 승승장구한 인물...

    바로 현 롯데그룹의 회장 '신격호'(윤봉길 의사의 폭탄테러로 다리를 잃고,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외무장관 시게미츠의 손녀딸과 결혼, '시게미츠'로 창씨개명)의 일정시기의 간략한 행적입니다..

    기존의 '국수주의 반일사관'에 따르면, 위의 '신격호'도 "강제징용자"의 분류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실증적으로 해방전의 그의 행적을 보면 사실 'B,C급 전범'에 가깝습니다..

    이런 경우가 재일교포 1세대 사회에서 비일비재했고, 그러한 1차사료들은 전혀 무시된 채 오로지 일정기의 일본인-가해자, 조선인-무조건 피해자의 사관으로 당시의 시대를 일도양단한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진빠 2013.12.08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타당한 말씀입니다.
      역사인식을 어거지로 하는 인간들은 지적역량을 떠나서 일단 세상물정에 어두워 보입니다.

  12. 주코프 2010.08.17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컨대, 조선인들은 왜 일본에 갔는가가 이 글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솔직한 말로, 상당히 많은 부분은(거의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족을 놔두고 전쟁시 동원되서 가는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고, 유학생의 경우 징병을 피하기 위해 '병가'를 내고 고향으로 와서 잠적해도 거의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대표적인 경우가 와세다 대학 출신이자 전후 이병도의 맥을 잇는 민족주의 사학자 '이기백'씨입니다..)

    물론 아주 일부의 경우는 당시 깡패소탕 차원에서 만들어진 '보국대(단장이 바로 '김두한'이었습니다)'의 선전에 속아 가족을 조선에 놔두고 징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상당수가 전쟁전에 이미 "경제적 목적"으로 가서 전쟁후 귀환하거나, 귀환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그 나쁜 일본놈들이 못가게 한게 아니라- 조선에 돌아가도 뚜렷한 경제적 비전이 없어서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이것은 제가 직접 일본에 거주하며 재일교포 1세대들을 만나서 증언을 들을 때마다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또다른 경우는 한국전쟁시기 및 그 이전의 4.3이나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해방후, 남한 정권과의 문제가 발생해서 밀항 비슷하게 간 분들도 있습니다-그 중 대부분이 조총련에 투신합니다. 그리고 제주도 출신들중에 이런 케이스가 특히 많습니다- 고쿠라 형무소에 불법밀항자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재일교포가 된 케이스이지요..(주로 3세대들은 귀화해서 의사등 전문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나, 출신학교는 이른바 북조운영의 민족학교가 대부분입니다..)

    아니면 이승만 정권때 정치적 탄압을 피해 자기말로는 "풍운의 뜻을 안고 (당시 비수교국)일본으로 (국가의 허가 없이) "유학"을 가신분들이나 그 가족분들도 있습니다.(대표적인 경우가 보도연맹의 창시자이자 반공검사 '선우종원'씨)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절대 좋게 안보니까 대부분의 대중매체에서는 "강제로 일본놈들에게 끌려가서" "일본놈이 못가게 해서 못온" 타입으로 왜곡한 부분 또한 많고,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지 징용-징병 문제에 대한 '실증적 접근'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 통탄 2011.03.14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하시는군요. 허나, 스스로도 일반화의 오류에 적용당하시는 셈이라는 거 기억하시길.

      (자발적 도일이 있었는데 왜 다 싸잡아서 강제징용이라 하냐 vs 강제징용이 역사적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왜 "상당히 많은 부분 (거의 대부분)"을 거론하며 싸잡아 자발적 도일로 처리하냐)

      별 칭찬 못듣는 동아일보에서 조차도 이런 류의 기사가 나왔었네요.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886/3/70070000000886/20100731/30230224/1

      *아래는 위 링크의 일부내용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징용된 게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일본에 건너왔다는 이른바 ‘자발적 도일(渡日)설’에 대해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 당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 명목으로 토지를 모두 수탈해 농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며 “사실상 일제가 강제징용으로 내몬 것을 자발적인 구직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고 하는 무책임한 말”이라며 분개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커피숍 주변에 앉은 일본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그는 거침이 없었다. 일제의 만행을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재일교포에 대한 무시가 만연한 일본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나름대로 체득한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씨와 아버지 이정호 씨(사망)는 ‘일본이 지우고 싶어 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일본 땅 안에 영원히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1989년 교토에서 동북쪽으로 50km 떨어진 게이호쿠(京北) 지역에 단바망간기념관을 설립했다. 이곳은 망간 텅스텐 등 각종 광물이 묻혀있는 광산지역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로 끌려온 조선 노동자 2000여 명이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린 곳이다. 이 씨의 아버지 역시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평생을 보냈다. 이 관장은 지난해 5월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폐관했다가 한일 시민단체들과 함께 ‘재건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모금활동을 벌이면서 내년 4월 재개관을 추진하고 있다.
      ===
      당시 조선 전체인구 대비 몇퍼센트에도 못미쳤을 "강제가 아니라 자발이었다"란 주장은 근거박약입니다요. 지금껏 일본 정부에 의해 깔끔히 인정되거나 해명되지 못한 일제 강점기의 인권 탄압/유린 그 자체를 문제삼는겁니다요 우리는 지금.

  13. 주코프 2010.08.17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붙여, 36년을 사실상 자신을 일본인으로 알고 살아왔던(리영희나 임종국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해방공간'의 '민중'이란 존재들이 얼마나 현재와 같은 친일-반일구도로 현실을 인식했는지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59년도 북송사업때 일본인 첩의 자식들을 반납치 비슷하게 데리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모델로 한 재일 작가 '양석일'의 '피와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미군은 조선에서 나가라!!, 매국노 이승만 일파에게 죽음을!!, 백두산 호랑이 김일성 장군 만세!!'

    ..일본어와 어눌한 조선어가 뒤섞인 이 선전구호가 거리를 울리자, 거리에서 구경하던 자들 중에 심심풀이 비슷하게 데모에 참가하는 이도 있었다. 김준평은 자전거를 멈추고 처음 보는 데모대를 신기한듯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원인으로 분단,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김준평에게 있어서 애당초 국가나 조국이란 개념 따위는 없었다. 고향인 제주도에 대한 추억은 있지만, 고향과 국가-조국이란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조선이라하면, 옛날 부산을 비롯해 서울, 대전, 대구 각지를 떠돌며 멸시받고 차별당하며, 직업도 구하기 불가능해 고생했던 기억만 있었다. 제주방언을 말하면 비웃음받고 어떤 자는 "똥돼지 울음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물론 그때마다 김준평은 물러서지 않고 치고받는 싸움을 반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준평의 완력을 강인하게 단련시켜준 것은 바로 그 '조국'의 '그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 과연 이 소설 속의 주인공 김준평이 예외적인 케이스일까요? 상당수의 재일1세, 2세, 그리고 우리나라의 시골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의 8.15회고를 직접 들은 경험으로는 대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당신 일반 민중의 한계이자 현실아니었는가 여겨집니다..

  14. 2010.08.17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5. 미루엘 2010.08.19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발적으로 일본에 간 사람들을 '징용'에 포함하지 말자는 논의 자체의 유의미성은 인정합니다만,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 및 권리에 대한 주장은 '실증적 접근'을 위한 '실증적 근거'가 부족해 보이며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일본 당국은 사업장 내에서 임의의 사형(私刑)이나 체벌을 단속"..는 반대로, 실제로 그런 사실이 발생했고, 당국이 나서야할 정도로 만연 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읽기에 따라서는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정당한 처우와 대접을 받았다"는 본 논의의 비판대상인 '비실증적 접근'을 유도합니다.

    • 無名氏 2010.08.19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임금이나 대우면에서 일본인 노동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2. "일본 당국은 사업장 내에서 임의의 사형(私刑)이나 체벌을 단속" 문건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와 태업에 따른 일본 정부의 조치입니다. 부당한 대우에 정치적 행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번째로는 우리가 마냥 노예같은 굴종적인 근로환경에서 일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3. 일본 본토에 소재하고 있던 탄광들은 지역별로 근로환경과 임금수준, 복지가 천차만별입니다. 부당한 대우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전체적인 민족문제로 단정짓는 것이야 말로 근거가 없는 논리의 비약입니다.

      4. 근거가 부족하네 마네 하는 것은 애초에 선입견을 가지고 문제를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지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컨대, 이 글의 주장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면, 그에 대한 반론자료를 제시하시면 될 일입니다. 본인이 동의하고 말고는 다른 차원이며, 지엽적인 시빗거리에 불과하다고 보입니다.(실증성의 차원에서 반박하려면 당연한 것이죠)

      노예같이 혹독한 착취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쪽의 주장이야말로 비실증적이고 근거부족이라는 취지에서 이 포스팅이 쓰여진 것이니까요.

    • 미루엘 2010.08.19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입견 없습니다. 노예같이 혹독한 착취를 받았다고 주장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임금이나 대우면에서 큰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대한 지적도 아닙니다. 그리고, 마냥 노예같은 굴종적인 근로환경에서 일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전혀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예로드신 것은 정치적 행동이 가능했다는 것 만을 증거하지,
      "사형(私刑)이나 체벌을 단속"이 전혀 없었다를 증거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형(私刑)이나 체벌을 단속"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조선인들이 노예같은 굴종적인 근로환경이었다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조선인 노동자가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단정하듯 말씀하고 계시고, 천차만별이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했다, 민족 전체가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있습니다. 그 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無名氏 2010.08.19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적 없는데요?

      그리고 "모든"이라고 한 적도 없고 "전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일부"가 있었다고 "모두" 그런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냐는게 제 취지입니다.

      본문에도 그렇게 써져있지 않습니까?

    • 미루엘 2010.08.19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부"가 있었다고 "전체"가 그런 대우를 받았다는게 타당하냐'는 취지가,

      '"일부" 있었지만, "전혀" 그런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로 보인다는게 문제죠.

      그래서, "읽기에 따라서는 '비실증적 접근'을 유도한다"고 했던 것이고, '실증적 근거'를 보강해달라는 요청이 첫 리플이었습니다만...

    • 無名氏 2010.08.19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거야 반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죠.
      제가 상대방의 논리까지 입증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상대방의 비실증적, 감정적, 정서적 문제접근에 대한 반론일 뿐이죠.
      지금과 같은 국사교과서의 기술방식으로는 왜곡된 지식을 배울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물론, 이곳은 논문을 작성하는 곳이 아니니 논거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자신은 아무 증거도 못내놓으면서 못믿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입니다.

      본 편은 서론적인 접근일 뿐이고.. 틈나는대로 자료는 계속 보강하는 포스팅을 올릴 예정입니다만..
      역시 수꼴새끼들은 친일파 라는 선입견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무슨 자료를 보여줘도 못믿는 분들이 태반일테니까요.

    • 無名氏 2010.08.19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게다가 님의 포스팅을 지금 읽어봤는데,

      제 글의 논지를 전혀 이해못하고 계십니다.

      이 글은 강제징용이 있었다. 없었다.를 논하는 글도 아니고
      일본 당국의 죄가 있냐. 없냐의 문제를 논하는 글도 아닙니다.

      마치 기존의 5.18 서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더니
      전두환의 죄가 있냐 없냐로 몰던 분들과 똑같군요.

    • 미루엘 2010.08.19 1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당 포스팅의 서두에 이야기 했지만, 논의 자체에 대한 반박이 아닙니다. 본 논의가 미칠 영향에 대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럼 이만.

  16. 미루엘 2010.08.19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론 논문을 작성하는 곳도 아닌 것 맞습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비실증적, 감정적, 정서적 문제접근에 대한 반론이 역시 비실증적이어서는 설득력이 없겠죠. 차차 자료를 보강하신다니 기다려보겠습니다.

    애초에도 이야기 했듯, 논의 자체의 참신성과 의의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어, 따로 벨리에 포스팅했습니다. 무명씨님과의 댓글이 재밌긴 하지만, 여기서의 댓글은 이만하도록 하겠습니다.

  17. 2010.08.31 0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8. 어이 2011.02.28 0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기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작업능률이나 생산성이 일본인의 60%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인 근로자가 지급받는 임금이 일본인에 비해 차별일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 그럼 왜 대려다 써서 문제 생기게 만들었나..
    누가 대려다 쓰래?ㅋㅋ 억지임 ㅋㅋ
    자기네가 대려다 써 놓고 능률이 떨어진다? 그래서 임금을 적게 준게 차별이 아니다??
    그럼 안쓰면 되지/

  19. april 2015.08.31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의 일부만을 부각시켜 전체를 호도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하지 않나요? 중국에서 일본에서 맞아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간 넋들이 님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뭐라말할까요 탁상공론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고 그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그 고통을 알려하지않고 숫자놀음이나 하고 책에 기록된 내용만가지고 떠드는것이 올바로 역사를 보는 것인지 의문이군요. 숫자가 알려진 것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요 반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하나요 자신이 원하는 자료만 보고 그 자료에 근거해 자신의 생각을 떠드는것 진정을 역사를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는 아닌것 같군요.

  20. april 2015.08.31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록된 것이 지켜졌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않다면 오직 기록만이 중요하다는 뜻인가보죠 기록이 그렇게 되어있으니 옳다라면 일본이 을사조약 한일병합을 맺은 모든 조약이 강압적인것도 아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겠군요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랬는지 의심해 보아야하는게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가장 우선적인 태도라는걸 배운적이 없나보군요

  21. 이라 2016.04.17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대 강제 징용입니다!! 안가면 감옥가고 탄압받고 월급도 최저생계비에 택도 안됩니다 감옥이 따로 없습니다 거기다 tv에선 미성년자가 학도병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싸우다 개죽음 당하는 영화를 보여주고 참 싫습니다 하긴 옛날 6.25때는 월급은 개뿔 싸우다 뒤지지않으면 다행이었고 전후에는 상습 구타 사망 사건도 비일비재했다더군요 군대 강제 징용 배상해야합니다!!!! 일인당 월80만원씩 전부 배상해줘야합니다!!!!!